◆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소식을 듣고 며칠 잠을 못 이뤘다. 기쁘기도 하지만 과연 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했는가, 무엇보다 함께 고생한 단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고 착잡한 기분마저 들었다. 연극인에게 주는 큰 상이지만 상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생했다고 주는 것이라 고맙기도 한 반면 상을 타고 난 후의 일들이 번거로울 거 같아 부담스러웠던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불평불만하지 않고 열심히 잘 따라와 주고 함께 고생해주는 우리 단원들을 대신해서 내가 상을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수상한 올빛상은 올빛상은 올올이 빛나는 연극인상으로 한국여성연극협의회에서 주최하며 희곡, 평론, 무대예술, 연기, 연출, 신인연기자상 등 5개 부문에 걸쳐 서울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서 시상한다. ◆연극은 언제부터 경주여중 2학년때 경주고등학교의 연극반 선생님이 주축이 된 에밀레에 들어가 유치진 극본의 ‘소’에 참여하며 첫 무대에 올랐으니 43~4년은 된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시간에 교실에서 무심코 탁자에 서서 며칠 전에 본 영화에서 남자배우의 너털웃음을 흉내 내다가 복도를 지나가시던 시인 박주일 선생님께서 우연히 목격하시곤 교실에 들어와서 나를 불러 “니 연극 함 해볼래?”하시며 경주고등학교 연극반 선생님들을 소개시킨 것이 연극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 ◆연극과 나의 인생을 결부시킨다면, 연극이 미친 영향, 연극인으로서의 나의 삶 근화여고에 진학했는데 학교에 재직하시던 윤경렬 선생님과 서영수 선생님의 감성이 큰 도움이 됐다. 대경대 연극영화과에 전면 장학생으로 들어가 2006년에 졸업했다. 당시는 연극정보도 없었다. 1957년도 에밀레를 창단한 작고하신 황동근, 김태무 선생님이 어렵게 극단을 이끌어오고 계셨고 그 후 서울에서 영화 사업을 하던 이수일씨가 낙향해 경주연극을 맡아왔다. 오랫동안 에밀레를 이끌어온 단장이자 연출가이셨던 이수일 선생님과는 머무름도 떠남도 함께 지켜보며 지난 세월의 산증인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현재는 연극영화과 출신들이 주를 이루며 20여명의 단원들이 연극을 집중연구하며 신라문화와 정신이 깃든 풍부한 설화와 전설을 다듬어 신라문화로 뿌리내리려고 애쓰고 있다. 학교 연극반에서 멋모르고 연극을 시작했는데 연극이란 한 10년간은 해봐야 제대로 연극이 보인다. 한해도 쉬지 않고 연극했다. 처음엔 연극 자체가 좋아 미친 듯이 연극했고 나중에는 연극하는 사람이 좋아 연극했다. 당시엔 연극멤버들이 부잣집 아들들이 많아 자금이 돌아가니 큰 어려움도 없었고 여자 배우가 거의 없어 주연을 도맡아 놓고 했다. 연극지원도 한계가 있고 세월이 흐르고 나니 다 떠나고 의무감이 남게 되고 나중에는 오기로 남아 연극한 시절도 있었다. 경주다운 연극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을 주고 연극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일외에는 활동반경을 줄였으며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쉬려고 한다. 연극이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다 보니 색깔이나 마음이 서로 달라 싸우기도 하며 15년, 17년, 혹은 20년 세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만나 연습하고 부대끼고 해왔기 때문에 한 가족 같은 정이 들었다. 그래서 상을 받을 때도 단원들에게 더 미안했다. 박봉으로 살아가는 단원들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연극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주말 반월성 공연 같은 데는 무대나 음향, 음악, 시설, 의상 등 소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필요하다. 희곡 제작 발굴부터 기획제작 비용하며 춤, 창 등 역할의 특성을 배워야 하는 그런 과정이 힘들고 어렵다. 캄보디아에서 열린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연 때 공연이 끝난 후에 현지인들을 만나면 손을 흔들고 미소를 보내며 한국인들을 반겼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한국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경주 경제에 보탬은 되지 않지만 문화매개를 통한 한국을 알리며 경주이미지를 홍보한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왜 세상에 나왔나, 내가 왜 대한민국 경주에 태어났나, 나는 왜 연극을 하고 살았나 하는 한 번씩 그런 생각에 빠진다. 연극을 하며 살지만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선지 현실보다 무대에 서면 더 편안하다. 극단 에밀레 단원들은 예전에는 보수도 없고 그저 연극이 좋아 모인 사람들이라 생계를 위해 낮엔 직장 다니고 저녁에 모여 연극연습을 했다. 경주시립극단으로 전환되면서 처음엔 급여만 있고 제작비 지원은 없었다. 작품을 결정하면 제작비는 단원들이 염가로 표를 팔아 제작비로 충당하며 15년간을 어렵게 이어오다 적지만 제작비가 나오고 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30년을 연극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고 경주에 태어나 오빠나 가족들이 주위에 있어 어려운 시기를 지내오기에 가능했다. 지난 10월에 열렸던 제1회 국·공립연극페스티벌때는 외지 연극단원들이 와서 감탄하며 경주를 부러워했다. 내년에는 시에서 배려해 내년 예산확보 되는 데로 제2회 연극페스티벌을 추진하게 된다. 우리 시립극단이 유지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근화여고나 경주고 신라, 문화고 등이 학생동원을 많이 해 줘서 빚안지고 제작할 수 있었고 도와주신 분들께는 늘 고마운 마음이다. 예전에는 직장 다니고 저녁 퇴근 후 연습을 하다 보니 10년쯤은 해야 제대로 연극을 하는데 모션이나 동작, 눈짓, 몸짓, 발짓, 규칙 등을 5년쯤 가르쳐 놓으면 취업이다, 결혼이다 해서 떠나버린다. 그래서 직장을 알선하고 스폰스를 해주는 분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다. 낙천적인 성격에 ‘무작정 덤비는’ 스타일이다 보니 지금까지 견디어 온 것 같다. ‘하면 된다’ 버텨 온 연극의 힘은 마약성분처럼 또 모이고 싶고, 도전하고 싶고 끝나면 허전하고 예민해진다. 연극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에 따라 표정이나 몸짓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의사가 앓는 폐병과 농사꾼이 앓는 폐병을 생각해 봐라,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시장을 가더라도 사는 사람, 파는 사람, 옷 입은 차림새, 신발, 머리, 눈짓하나까지도 관찰한다. 그것이 연극을 이끌어 내는 배우로서의 역량을 키운다. 김동리 선생님의 ‘무녀도’를 무대에 올릴 때 ‘모화’역을 맡았다. 모화가 물에 빠져 죽은 혼을 건지는 굿판 연기가 20분간 펼쳐지는데 이 혼 건지는 무당이 되기 위해 국악원에 가서 돈을 주고 ‘무당춤’을 배우고 무당이 점을 치거나 굿을 할 때 어깨를 떠는 행동(신과의 접신 신호)이 궁금했다. ‘모화’가 되기 위해 당시 경주에서 제일 큰 신엄마라고 불리는 ‘계림보살’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혼건지는 역을 직접 전수 받았다. 경주에선 혼굿을 할 때 여자는 흰옷에 붉은 쾌자를 입고 부채는 지신, 요령은 천신을 상징하는데 실제 그것을 들고 연기할 때는 무당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 대구연극제에서 칼을 들고 객귀를 물리는 공연을 할 때는 관객들이 진짜 무당이 배우로 출연한 것으로 오해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아직 모화의 신굿 주술을 그대로 외우고 있었다) 이만희 선생님 작품 ‘그것은 바늘구멍 위의 목탁...’을 공연하면서 세 번을 삭발했다. ◆연극인으로서 후회는 없는지 연극인으로서 별반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과연 이런 많은 인생을 살고 체험할 수 있었겠나? 다양한 인생을 살아볼 수 있어 참 행복했다. 그러나 다음생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연극 안하고 싶다. 너무 힘들어 연극은 한 생으로 만족한다. ◆경력·수상, 가족관계는 1950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66년 극단 에밀레 입단, 87년 경주시립극단 창립단원으로 현재 한국연극협회 경주지부장과 극단 에밀레 대표, 경주시립극단 지도위원을 맡고 있으며 창작 초연 악극 ‘신라의 달밤’, ‘아비’ 외 120여편에 출연했다. 전국청소년연극제 대통령상과 금복문화예술상, 경주시·경북문화예술상, 행정자치부 장관상, 전국연극제 최우수 연기상, 김동훈 연극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에밀레 극단 연출을 담당하는 동지 같은 남편 이금수씨와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후배 연극인에게 조언한다면 후배 연극인들 지금 잘 하고 있다. 다들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연기에 대한 열정이 많아 박봉에 어려움이 많은데도 성실하게 열심히 연극에 최선을 다해주고 있다. 단지 자기 자신에 소극적이다. 바램이라면 활동영역을 넓혀 다양하게 교류하며 연기의 폭을 넓혔으면 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