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
구름과 안개를 머금어 품었다가 다시 또 창해에 풀어내기를 몇 천만 번이나 했을까?
동해의 저 먼 해원에서부터 밀려오고 간 격랑의 세파는 또 몇 억만 번이나 겨웠을지?
여기 경주慶州 토함吐含의 산정에는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나그네 바람이 지금도 ing- 숨차게 불어 넘고 있다.
해룡의 넋으로 있을 신라新羅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잠들은 수중릉.
그 바다 수평선의 일출을 내다보는 곳, 해발745m의 이 자리에 석굴암石窟庵 대불이 지엄하게 앉았다.
눈 감은 듯 깊은 묵상에 들어있는 저 지존의 형체, 석가모니의 자비가 오늘 이 땅의 중생을 위하여 해탈의 문을 열어준다.
현재의 석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에 속해있는 암자로서 원래는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석불사石佛寺로 창건된 독립 사찰이었다.
이는 불국사 중창 당시인 경덕왕景德王15년의 751년에 시작하여 김대성이 죽은 후에 나라에서 맡아 혜공왕惠恭王 10년이던 774년에 완공하게 된다.
김대성은 금생의 부모에 대한 인연의 보답으로 불국사를 지었고 이어서 전생의 부모를 위한 뜻으로 석불사를 만들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의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가 이에 대한 기록으로 남아있고 보니 이보다 더한 역사적 광영이 어디에 또 있으랴 싶다.
석굴암의 연대기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그 조영의 의미에서도 지극히 감동적이지만, 지정적 위치에서부터 조각 예술의 미술적 범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위대한 신라의 문화유산임을 다시 한 번 수긍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석굴사원의 축조방식은 원래 인도印度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는 수도승들이 외부의 영향에서 예배를 제약받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유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바깥 일기의 변화를 피하고 주거의 일상적 편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달한 예배환경인 셈이다.
이러한 불교사원의 축조성향은 4세기 후반 중국에 까지 전파되어서 돈황燉煌과 운강雲岡 용문龍門 등의 석굴사원으로 이어져 갔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후반에 유입되어지는데 단석산의 신선암神仙庵 남산南山의 불곡감실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과 군위의 제2석굴암 등이 그것이다.
석굴암은 규모 상으로 보아 인도와 중국의 정도에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지만 예술의 차원에서는 세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석굴암의 본존불, 석가모니 부처.
밝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빚어낸 조각의 솜씨에서 신라인의 놀라운 예지를 찾아보게 되는 것이 과연 안목에서 뛰어났구나 싶다.
설법으로 열릴 듯 다물은 입술, 깊어지는 상념에 다소곳 숙여있는 얼굴 표정하며 차분히 가부좌로 틀은 무릎 위에 사뿐히 내려놓은 손등에서 핏줄의 따뜻함과 생동같은 맥박이 느껴진다. 보라! 저 살아있는 듯한 피부의 탄력성에서 그렇지 아니한가?
본존불의 그 앞에 서면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 편안해진다. 불안도 없어지고 두려움마저도 사라지는 것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아가서기를 마다하지 않는가 보다.
왜 이렇게도 산 위에 올라 부처와 함께 세상을 보아야 하는지 이제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알고 보니 산은 선경이요 부처와 사람이 또한 자연이었음을 깨닫거니 소스라쳐 내 영육이 미혹을 떨쳐 일어난다.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제謙齋 역시도 미리부터 내다보아 이 유적의 전실풍경을 그려서 화필의 앨범으로 남겼다.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이 그것이다.
길을 내어주고 빛을 밝혀서 어둠을 지워버리는 불성의 자비.
석굴암은 종교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인문과 자연을 망라한 신라가 남긴 건축예술에서 백미 중의 백미일 것이다.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했던가?
김대성! 그 신라인의 자취가 널리 서라벌徐羅伐의 전부를 아우르고 있는 하룻날 저녁.
마른 나뭇가지 위를 옮겨 다니는 멧새들이 오늘밤 둥지의 꿈을 이야기 하는 듯 재재거리며 신호음을 보내는 중이다.
저렇듯 다정한 이웃들의 통신.
불현듯 집에 있을 가족들이 그리워진다.
우리가 하고 있었던 일상의 대화는 무엇이던가?
나 이제 나직한 사랑의 음성을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