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산東南山 지맥으로 통하는 쑥드듬골을 지나면 그다지 불편하지 않게 천동골 들어서는 오른편 계곡이 나타난다.
잡목이 우거진 골짜기에는 정적이 짙어 여기저기 크고 작은 화강석 바윗돌이 서로 기대인 듯 엉기어서 꼬불꼬불 석경의 산길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다.
어느새 저렇듯 두텁게 쌓여있는 처처의 낙엽들이라니….
아! 벌써 겨울의 마당 가운데 섰음을 눈으로 깨쳐 알겠구나.
저만치 뼈대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겨울산 내면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그 안쪽, 오른편 비탈의 펀펀한 지대에 아름드리 굴참나무들 그늘에 묻혀서 덧없이 사위어 간 인문사를 떠올리며 초연히 머물은 석조유물 한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 산중에서 반갑다.
평면의 둥근 돌에 깊은 내공으로 비어 있는 디딜방아돌.
여기가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설화가 남아있는 신라新羅의 천동골千洞谷이다.
이렇듯 경주 남산慶州 南山 곳곳에는 신라인의 주민등록 카드가 선명하게 현물로 남았고 보니 아무리 천오백년 세월인 고대사라고 한들 하나도 낯설지 않는 우리 어릴 적 고향 풍물로 착각되어진다.
지금 막 귓전에는 쿵더덕 쿵더덕 엇박자로 짚어가는 방아노래가 찌그러덕 거리는 소리의 시김새와 더불어 반복적으로 들려오곤 한다.
어쩌면 한자락 방아타령에 그들 서로 얼굴 붉히기도 했을 젊고 수수한 아낙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마음 속에 그려 보게도 된다.
이쯤에서 계곡의 더 안쪽으로 3,4백 미터쯤 더듬어 가면 제법 길다랗게 축대를 쌓은 옛 절터에 이른다.
족히 20미터는 되리라 싶은 정면의 너비, 법당이었을 그 앞의 동서 양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 같은 천동탑이 각각 한기씩 놓여 있다.
동탑은 멀쩡히 섰는데 서탑은 몸통을 부러뜨려 패대기 친 듯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볼썽사납다.
탑돌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넘는 듯 2미터쯤은 되리라.
각각의 둥그스름한 몸체의 사방 표면에는 너끈히 백여 개의 숫자에 가까운 감실이 쑥쑥 주먹이 들어갈 만큼의 깊이로 패어져 보기에도 마냥 신기한 느낌이 든다.
이곳은 아마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서 밀교가 성행하던 시기에 조성된 신앙처였던 곳으로 보아지는데 탑의 감실마다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간에 모두 천개의 부처가 봉안되었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과거천불, 현세천불, 미래천불을 상징적으로 한 곳에다 모셔두고서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여기, 바로 천불천탑의 장소, 그 천동골의 현장이다.
보라! 가슴 설레지 아니한가?
깊으나 깊은 여기 심심산골에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3세 3천의 부처 앞에서 밤낮없이 불 밝히며 기도하였을 저들의 애틋한 삶을 생각하자니 아니나 뜨거워지는 가슴을 이 어쩌랴.
천불천탑의 밀교신앙은 비단 천동골 뿐 아니라 남산지역만 해도 몇몇 곳이 더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짐작은 남산에서 보는 천동탑 형식이 아닌 같은 맥락의 천불에 대한 예배신앙이 그 밖의 경주의 다른 지역에서도 성행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즉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에 있었던 천동소석탑千洞小石塔이라던가 현재 박물관에 진열된 천동모전탑千洞模塼塔의 석장사지錫杖寺址 출토 유물로 보아서도 그렇다.
필자의 소년시절에 있었던 기억으로는 옥룡암玉龍菴이 있는 탑곡塔谷의 그 안쪽 골짜기에서 여기의 것과 유사하게 스러져 있던 천동탑 한기를 보았던 적이 있다.
그 역시도 주먹 크기의 감실이 1.5미터의 기둥돌에 빼곡히 패어 있었던 것으로 그렇게 생각이 난다. 다만 돌 색깔은 이보다는 좀 검스럼하지 않았던가 싶을 뿐.
당시만 해도 이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 밖이었던 어린 시절이라서 그저 이상한 돌도 다 있구나 하는 정도의 그런 느낌뿐이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그 뒤 몇 십 년이 흐른 후 어느 날 우연히 지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살펴보았지만 찾아지지가 않았다.
현재는 기회 보아서 다시 한 번 집중적으로 답사할 예정으로 있다.
차중에 오늘, 경주 남산의 문화유적을 돌아보며 문화재에 대한 감회를 시상으로 바꿔 쓰시는 강인숙 님의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로서 천동골을 다녀오게 되는 필자의 소회를 피력할 겸 해서 옮겨 적음이니 저자의 양해를 정중히 구하는 바이다.
“태초, 그 뜨겁고 물컹한/ 마그마에 찍힌 손자국 같은/ 돌기둥 바위 감실마다/ 부처님 영靈 깃들어 계실까?/ 칠불암 계곡 지류 따라 오르면/ 폐사지터 무성한 잡목속/ 동탑은 서고, 서탑은 동강난채/ 옛 법당터에 넘어져 있는/ 천동골 천동탑 2기,/ 어떤 원願 있어/ 이 깊은 숲속 바위 감실에/ 천불천탑千佛千塔 모셨을까?/ 불국토 꿈꾸었던 신라인들/ 그 간절함/ 나도 두 손 모아 합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