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제 경주고 교사 은행나무는 환경적응성이 뛰어나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란다. 병충해가 거의 없고 수령도 매우 길다. 늦가을에 잎사귀가 노랗게 물들면 눈부시게 아름답고 떨어져도 깨끗하고 곱다. 은행나무 잎은 오리 발자국과 같고, 가지가 곧고 미끈한 오리 다리와 같다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부른다. 서원이나 정자에 가면 그 주변에 반드시 은행나무가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설과, 공자의 교탁이 은행나무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중국 곡부 공묘(孔廟) 앞에 행단(杏壇)이 조성된 것은 이 같은 뜻을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 유교문화유적지에 은행나무를 심어둔 것도 행단의 의미를 취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강동면 운곡서원의 은행나무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어서 흥미롭다. 운곡서원은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 권행과 죽림 권산해 및 귀봉 권덕린을 봉향하고 있다. 이들 중 권산해는 권전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권전의 또 다른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현덕왕후가 되었고, 그의 소생이 단종이다. 따라서 권산해는 문종과 동서 사이이고, 단종의 이모부가 되는 셈이다. 단종이 삼촌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듬해인 세조 2년(1456)에 권산해는 성삼문 등 여러 신하와 같이 단종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때 권산해는 일이 그릇된 것을 알고 조복을 갈아입고 다락에 올라가 떨어져 자진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가족들은 모두 변방으로 쫓겨나 금고를 당했다. 한편,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은 의분심이 강하고 성품이 과격하였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마침내 세조의 미움을 받아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지금의 영주 순흥에 이배되어 안치되었다. 그는 순흥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었다. 금성대군은 반역죄로 처형되고, 서울에서 내려온 철기부대는 순흥을 짓밟았으며 순흥은 풍기군의 속현으로 강등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순흥 객사에 ‘전설의 압각수’가 있었다. 단종 원년(1452)에 갑자기 이 나무가 말라죽으니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어느 술사(術士)가 이 나무 아래로 지나다가 “압각수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 고을은 복향(復鄕)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나 5년 후 금성대군의 난으로 순흥은 폐향되었다. 숙종 22년(1696) 압각수에 생기가 돋고 썩은 뿌리에서 피각이 쌓이더니 나무가 점차 살아나 숲을 이루었다. 그 후에 과연 순흥은 복향되었고, 2년 뒤 단종의 왕호가 회복되었다. 숙종 30년(1704)에 역신으로 몰렸던 사육신 등이 복권되고 육신사(六臣祠)가 설립되었다. 영조 18년(1742)에 육신이 신원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또한 압각수 아래에 금성단을 창설하였다.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 1745~1819)은 강동 국당에서 태어났고 권산해의 12대 후손이다. 그는 단종 때 사절(死節)한 충신들이 모두 복권되고 증직이 내려졌지만 유독 선조 권산해만 누락된 것을 보고 자손이 못난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나라에 글을 올려 하소연했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정조 13년(1789)에 권종락은 궁궐 앞에서 나아가 정조가 거동할 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여 마침내 옛 관직을 되찾았다. 권산해는 복관되고 증직이 내렸을 뿐 아니라, 금성단에 배향하고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종향되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운곡에 추원사를 창립하여 태사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권산해와 권덕린을 배향했던 것이다. 추원사는 뒷날 운곡서원으로 승호하였다. 권종락은 선조 권산해가 영예롭게 복관되는 일을 길이 남기려 하였다. 왕명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순흥 금성단의 압각수 아래에 이르렀다. 그는 충의의 전설로 불린 이 압각수를 추원사 앞에 심어두고 싶었다. 곧 큰 가지를 하나 잘라 행낭 속에 넣었다. 순흥에서 경주까지 둘러오는 거리는 4백여 리였는데 한 달 만에 도착하니 가지가 거의 말라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무의 생리(生理)가 없다고 했으나 그는, “선조의 충절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이 나무는 반드시 되살아 날 것이다”라고 하고, 묘우 곁 용추 위에 꽂아 심으니 그 해 6월 16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나무에서 차츰 생기가 돋아나며 살았다. 사람들은 죽림 권산해의 절의와 권종락의 숭모 정성에 의해 죽은 나무가 다시 살았다고 감탄하였다. 이는 「죽림집(竹林集)」 압각수기(鴨脚樹記)에 실려 전한다. 경주에 수령 2백여 년이 넘은 은행나무 가운데 이곳만큼의 수세가 무성한 나무도 없다. 지난 주말 푸른 솔잎과 대나무 숲에 어우러진 운곡서원의 압각수는 채색할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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