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제(경주고 교사) 내남면 상신리에 오래된 큰 고택이 붕괴 직전의 폐가로 남아있다. 바깥채 ㄱ자(字) 형 전면은 8칸이고 측면은 5칸이며 앞뒤 마당에는 가을 풀만 무성히 우거져 있다. 인근 사람들은 이 집을 ‘노참판 고택’ 또는 ‘노영경 고택’이라 부른다. 노영경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흠제(欽齋) 노영경(盧泳敬, 1845-1929)의 본관은 광주이고 경남 기장군 송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증손 류석우가 지은 묘갈명을 보면, 어려서 기백이 뛰어나고 재주가 영민하였다. 그가 서른 두 살 되던 해인 고종 14년(1877)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정세는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마침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다. 그 날 노영경은 내전 당직이 아니었으나 새로 부임한 당직이 군란 소식을 듣고 도망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난군을 뚫고 대궐로 달려가니 대소 신료들은 모두 달아났고 없었다. 임금의 안위를 예측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는 승지 조병직과 같이 고종을 부축하여 황급히 안전한 곳으로 피한 후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노영경은 고종을 업고 난군을 피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고종의 명을 받아 주변 신료들을 모으고 깨우치자, 그의 충심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고종 21년(1884) 겨울에 그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그는 조정에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고종은 임오군란 때의 일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얼마 후 다시 갑신정변이 터졌다. 그는 역시 대궐로 달려갔으나 김옥균 등이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갔음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노영경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대궐에 소장하고 있던 여러 보물과 서책을 거둬 감춰 두었다. 원나라 장수 원세개가 그의 충정을 보고 참으로 ‘옥당관(玉堂官)’이라 하며 탄복하였다. 그는 사흘을 굶었다가 고종이 돌아온 후 비로소 밥을 먹고 감춰둔 열성조의 유물을 손색없이 다시 배치하였다. 고종 22년(1885) 봄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정변 때 고종을 한결같이 호종한 공에 의한 것이었다. 예조 참의 등을 역임하고 고종 26년(1889)에 안변 부사로 나갔다. 그곳에서 많은 치적을 남기고 이듬해 봄에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였다. 부윤 노영경은 주민들의 고질적 병폐를 없애는 데 주력하였다. 먼저 각 면의 11개 역참(驛站) 이정들의 상습적 폐단을 없앴다. 동면(東面) 주민에게 껍질 벗긴 삼대를 부과한 공물인 마골전(麻骨錢), 황룡산의 잣을 공납하게 하는 백자납(栢子納), 동해면 어일리의 시조(市租)와 어민에게 부과한 어곽세(魚藿稅)를 모두 혁파하였다. 그리고 향교 유생들에게 학문에 힘쓰게 하였고 향음주례를 행하여 고을 풍속을 순화하였다. 또한 재난을 들었을 때 3백 여 유랑민에게 각각 곡식과 돈을 진휼하며 보살폈다. 그 러나 그는 선산 군수 김사철 등의 농간으로 관직을 버리고 경주부 남쪽 왕산리(旺山里)인 지금의 상신리에 새 터를 정해 집을 짓고 입주하니 고종 29년(1892) 봄이었다. 곧 현재보다 훨씬 더 큰 넓은 대지에 저택을 지었던 것으로, 지금 건물은 그 때 지은 것이다. 경주 부민들은 그가 베푼 혜택을 잊을 수 없어서 관내 선정비를 무릇 13기나 세웠다. 앞서 그가 안변 부사로 있을 때 9기의 선정비를 세운 바 있어서 선정비만 무려 22기를 세웠다. 경주에는 그의 고택에 있는 2기를 비롯하여 모두 7기가 파악되고 있으며 나머지의 것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광무 원년(1897) 가의대부에 오르고 원승(院丞)에 임명되었으며, 1904년에 충남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908년에 순종이 남순(南巡)했을 때 마산으로 달려가 뵈었고, 이듬해 봄 상신리 자택 부근에 왕산서숙(旺山書塾)을 설립하여 학동을 불러 모아 예를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 합방 소식을 듣고 호곡하며 일체 인사를 폐하고 칩거하였다. 1911년 봄에 왜경은 일본 천황이 내린 관작을 받으라고 통고하자 아들 노성일을 보내 거절하였다. 따라서 왜경이 찾아와 그를 발길질하며 칼을 목에 대고 위협했다. 그는 죽음으로써 저항하며 끝내 굴하지 않으니 저들은 물러갔다. 1918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설위(設位)한 뒤 망곡하고, 옛 제도에 따라 조석으로 곡을 하였다. 노영경이 죽었을 때 경주 사림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는 토지 등 많은 재산을 남겼으나 일정 강점기를 거치면서 관리되지 못했다. 후손들은 흩어져 살면서 가세는 더욱 어려웠고, 따라서 본 가옥마저 타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주인이 몇 차례 바뀌면서 가옥은 퇴락 일로에 놓였고, 급기야 경주시에서 붕괴 위협의 경고문을 붙여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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