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안고 있는 북향화北向花의 골짜기.
남산南山의 용장사茸長寺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발아래 물빛은 서늘하고 봉우리의 하늘은 파랗게 저려 있다.
멀어도 한참이나 먼 저 아득한 허공의 영성靈性.
한때는 달인 듯 별인 듯 고매하게 살다 간 선사先士들의 모습이 이제는 보이지 않고 불러 도 대답이 없다.
철철 넘쳐흐르는 물소리의 여운만 심인心印인 것처럼 가슴 안으로 채워질 뿐인데 걷고 걷는 바람길 고개 위엔 한 가닥의 비애가 가을빛 단상으로 물든다.
능선을 타고 넘실거리는 사화史話의 파도.
그 거센 물결이 할퀴고 간 어제의 상흔들을 기억하는지 용장사 절터를 굽어보는 금오산金熬山 정상의 그 한 언저리에는 고고함의 3층 석탑 한기가 자기 모습의 강건함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겉으로 넘쳐나는 기백, 그러나 어딘가 모를 쓸쓸함에 겨워서 산신山神처럼 성자聖者처럼 홀로 즐기는 고독.
신라시대新羅時代 법상종法相宗 사찰이기도 한 여기 용장사터 옛절은 그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고 다만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4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서 아마도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사찰이 아닌가 추정해 볼 따름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전기로 들게 되면 용장사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1455년의 세조에 의한 단종 폐위 사건과 관련하여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산에 머물렀다는 것이 괄목할 만한 용장사의 기록으로 비쳐진다.
이즈음 김시습은 삼각산三角山의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를 하던 때이었는데 세조의 부당한 집정을 반대하여 그곳을 떠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는 두루 팔도를 떠돌며 관서關西지방과 관동關東지방을 거쳐 호남湖南지방까지도 유랑하던 끝에 마침내는 경주慶州의 금오산 金熬山인 남산의 용장사에 몸을 기탁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운명적인 기행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강릉江陵 사람으로 법명은 설잠雪岑, 31세부터 37세가 될 때까지 7년간을 남산에 기거하며 은적골의 은적암과 용장사로 가고 오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유금오록의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하였다.
은적골 암자에서의 하루하루, 틈틈의 여가에서는 차茶를 즐기며 시를 쓰기도 하였으니 매월당 그의 일상은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 청빈의 삶, 자연에 묻힌 낙도의 생활이었다.
何處秋深好 秋心隱士家 新詩題落葉 夕膳綴籬花
하처추심호 추심은사가 신시제낙엽 석선철리화
木脫千捧? 苔心一徑? 圖書堆玉案 瞑目對朝霞
목탈천봉수 태심일경사 도서퇴옥안 명복대조하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라 제목하니 ‘가을이 깊어 어디가 좋은가?’ 라는 시한구절이다.
‘은사의 집에 가을이 깊었구나
새로운 시는 낙엽 위에 쓰고
저녁찬에는 울타리 꽃을 줍는다네
나뭇잎 떨어지자 산봉우리는 여위고
이끼 덮인 외로운 길이 멀기만 하네
도서를 책상 위에 쌓아두고 서는
눈을 감고 아침빛을 마주함이여’
그는 용장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영월에 귀양 간 단종에 대하여 애석함을 떨쳐내지 못함으로 한 송이 뜨락의 꽃을 보면서도 일편단심 님을 불러 노래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양지바른 곳, 여기 은적골에 심어서 피워낸 차꽃을 일러 전설의 그 꽃잎! ‘북향화’라 이름 지은 것은 아니던가?
이렇듯 한세월이 구름 흩어지듯 사라져 가고 마침내는 성종2년인 1471년에 경주를 떠난 후 1482년에 환속하였고 1493년이 되는 해에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51세를 일기로 한 많은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이른바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이 또한 한조각 구름이 일었다 흩어져 간 우주간의 자연현상이겠지마는 폐허로 남은 용장사 석축의 사이사이에 더께로 쌓여 앉은 진토야 말로 이만저만 아니 느낄 수 없는 세월의 허망함이려니 싶어진다.
매월당의 용장사.
설잠, 김시습이 적어내린 몇 편의 시들이 거미줄처럼 치렁치렁 심사를 옭아매는 지금
웬지 모를 우수마저도 함께 스럼스럼 뼈 속에 까지 젖는 듯 쓰라린다.
용장골 산이 깊으니 오는 사람 보이지 않고
가랑비에 젖은 시누대만 여기저기 자라있네
스치는 바람에도 들매화 곱게 흔들리니
들창아래 사슴도 함께 조용히 잠들었네
낡은 의자에 먼지만 재처럼 쌓일 제
깰 줄 모르는 억새처마 끝에 들꽃이 피고 지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