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더 가까이로 다가서는 실루엣.
멀리 더 멀리로 여수旅愁는 그리움을 쫒는다.
선을 그리고 채색을 올려보는 가을 풍경의 소묘
사념으로 지웠다 그렸다 하는 캔버스엔 애초부터 나의 사인(sign)은 없다.
토함산吐含山 오동수가 방울로 떨어져 시래골時來谷을 적시며 물길을 트는 샛강, 그 강물은 말갛게 모래색으로 바투어서 반월성半月城을 휘돌아가며 남천南川의 소리, 남천의 노랫장단을 엮어낸다.
백발의 억새꽃들이 이별인 듯 아쉬움을 흔드는 강나루.
시월로 넘긴 달력 위에 또 하룻날이 물처럼 배처럼 떠나간다. 갯마을의 동남산東南山 비탈길에 술렁이는 하늬바람이야 늘 하는 버릇으로 경상북도 임업시험장의 대나무 숲을 마구 뛰면서 한두 번씩 연이어 쑤-아 쑤-아 휘파람을 불어댄다.
대밭을 경계 지은 울타리를 따라 조금만 오르다보면 야트막한 능선을 넘어서게 되는데 여기서 부터가 미륵골彌勒谷이다.
이곳에는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말끔한 도량의 보리사라는 절집이 있다.
원래는 신라때의 보리사 절터인데 근년의 얼마 전인 불사佛事로 하여 새집을 짓고 옛 이름을 그대로 호칭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을 대표하는 매우 뛰어난 보물 제136호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1기가 존속한다.
사찰경역의 담벼락을 넘어서 바위산 암벽을 배경으로 하여 좌상의 부처가 그지없이 경건한 모습으로 앉았는데 상단의 앙련과 하단의 복련으로 된 팔각의 기단 대좌위에 화려한 광배를 등에 받쳤으니 보거라! 신라불상의 진수가 이 아니던가? 그지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아있는 여래좌상의 매무새.
조각의 섬세함과 체구의 풍만함. 거기에다 더불어 온화한 미소에서 자비가 넘쳐 내린다.
천년의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저 칼칼하게 도드라진 연화대좌의 꽃잎사귀 하나하나에서 온 천지에 화광으로 가득 퍼져나는 생동이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신라의 국혼에 대하여 증거함이리라. 그러나 진작에 보리사 좌상의 여래는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신광身光으로서 만이 법法을 전할 뿐, 사인 없는 나의 가을스케치처럼 세간에 던지는 화두란 진작에 있을리야.
하면 부처는 어떻게 말하는가?
「금강경金剛經」에서 이르기를
“須菩提! 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섯 종류의 말을 뜻한다.
부처의 설법은 진실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말한다. 그중에서 한 가지 ‘여어자’는 말하지 않음을 말한다는 것인데 불가설不可說, 불가설이라, 즉 말할 수 없도다, 말할 수 없도다가 아니겠는가?
‘여어如語’란 부처가 49년간이나 설법을 말해 놓고서도 결국엔 한마디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함이거늘 이것이 부처의 진정으로 환치되는 역설적 언어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보리사 석불여래좌상도 결국은 아무런 소리 없이 그저 신광으로서 말하는 것만이 전부의 설법이라 할 것이다.
산 위에서 멀리 내다보는 속진의 세상,
저기 동방의 철길마을에 억새밭처럼 사양에 흔들리는 고층 아파트의 군락, 요즘 한창 분양을 홍보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나 신규주택의 물량공급에 있어 과다현상 때문인지 아니면 입주자들의 까다로운 입맛 탓인지는 몰라도 구매자의 열기가 그다지 뜨겁지 않아 보여서 은근히 안타까운 마음이 채여든다.
가을의 애상哀想, 가을의 시심詩心!
‘추야우중秋夜雨中’이라
가을 밤 빗소리에 귀를 여는 최치원崔致遠(857~? 헌안왕1~?)의 시 한편을 사색하랴만 아직은 여늬와는 다른지라 감흥이 밤만 같으랴 싶어 이 또한 환우려니 한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추풍유고음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창외삼경우 등전만리심
가을바람 쓸쓸히 읊조리나니 세상길에 참 벗이 없음이여!
창 밖에는 삼경의 빗소리 들리는데 등잔 앞엔 만리로 치닫는 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