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준(수필가/법사)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가을입니다.”
해바라기가 담장 넘어 길게 목을 내밀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길가 코스모 스가 한들한들 춤을 추며 가을을 예찬(禮讚)하고 있다. 어느새 가을의 문턱 에 접어 든 것이다.
금년 여름의 무더위는 정말 지독했다. 메스컴에서는 십년 만에 찾아온 폭염(暴炎)이라고 했지만 내 기억으로는 금년 같은 무더위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것 같다. 열흘이 넘도록 35~6도의 폭염이 계속되니 ‘이러다가 가을이 영영 오지 않는 것 아닌가?’하고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곤 하였다.
그러나 그 무덥던 여름도 백로가 지나가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썩 물러나고, 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연의 힘은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천리에 역행한다.”고 하였다. 무엇이 천리인가? 해가 뜨면 지는 것이 천리이며,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이 천리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천리이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천리이다. 인간은 이러한 천지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가르침이다.
지난날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 그리고 어느새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종착역이 저만큼 보이는 곳까지 와 버렸다. 인생의 종착역이 어디인가?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달려가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죽음이다.
기실(其實)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 간다는 의미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시간은 돈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시간은 곧 생명이다. 하루가 지났다는 것은 내 생명이 하루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내 생명이 일 년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잠시 잠깐이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 그러는 사이 해가 거듭되면 병들어 결국은 길기만 한 것 같은 인생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악한 짓만 하다가 명이 다하여 저 세상으로 갔다. 저승사자는 그 사람을 염라대왕 앞으로 끌고 가서 “대왕이시여 이자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 부모에게는 불효했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치 않았으며 갖은 악행만 일삼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적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요.”하고 말하였다.
저승사자의 말을 들은 그는 염라대왕에게 “대왕님 저는 살아생전에 염라국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다음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더라면 제 인생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대왕님 정말 너무 하셨습니다.”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내가 보낸 세 명의 사자(使者)를 못 보았단 말인가?”
“못 보았습니다.”
“너는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못 보았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수없이 보았습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이 내가 보낸 사자니라. 너는 그런 사람을 수 없이 보고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느냐. 너는 이제 죄에 대한 업보로 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너의 부모나 형제, 자매 친구나 친척이 한 일이 아니고 네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
염라대왕이 말을 마치자 저승사자는 그를 끌어다가 활활 타는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져 버렸다.
노인과 병자와 사자(使者), 우리는 누구나 이 세 명의 사자를 수없이 보고 듣고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기만 할 뿐 정작 저 세 명의 사자가 나에게 보내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니체란 철학자가 잘 지적했듯이 ‘나는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 세 명의 사자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느닷없이 통고 받게 된다.
그리고 그때서야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지나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 잘못 투성이였고, 나쁜 일 투성이였고, 후회 투성이였음을 알고 다시는 나쁜 일 않겠다고 애걸복걸 해 보아도 세 명의 사자가 직접 나에게 다가온 후에야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해마다 피는 꽃은 같거니와 사람은 같지 않다. 그러나 변모하는 것은 어찌 인간사(人間事) 뿐일까? 올 해 핀 꽃도 엄밀히 따지면 지난해 피었던 꽃은 아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流轉)하고 모든 것은 물처럼 흐른다. 똑같은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씻을 수 없다. 흐르는 물이 다르듯이 발을 씻는 나 자신도 늘 변모한다.
오늘은 오늘로서 영원한 것이다. 똑같은 하루는 영영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를 천금(千金)보다 귀하게 여기고, 알뜰살뜰 살아야 한다. 만약 하루를 헛되이 보낸다면 그것은 영원히 헛된 자국을 남기고 말게 될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