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엊그제가 입추立秋. 말복도 지났으니 이제 한 열흘 뒤면 처서處暑가 된다. 장마전선이 물러나고 곧 따라서 온 4호 태풍 ‘뎬무’마저 예상보다 쉽게 꺾였으니 피해가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에서 그친 것만도 참으로 다행이다.
연일 찌는 듯한 폭염 속의 잠 못 드는 열대야 현상.
37~8도를 오르내렸던 이번 여름철 낮 기온이 기상관측사상 최고치의 기록이란다. 하건만 이제는 더위 끝.
아침저녁 강변을 걷노라니 서늘한 기운이 옷자락에 스민다.
조금 조금씩 바람을 풀무질하는 억새들의 몸사래.
풀섶의 여기저기에선 귀뚜라미의 연창이 어우러지고 있다.
신라新羅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의 뜻과 인간의 상념이 내통하는 접신지대, 경주 남산慶州 南山과 삼릉三稜 계곡에도 낭만의 계절이 찾아 왔다.
부대껴 상처받은 여한의 세상사. 오늘 모두 여기에다 헤쳐 놓아보면 어떨까?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산중내곡山中內谷에서 무한해량의 안광이 좌르르 쏟아져 내린다.
오라며 부르는 소리 나직하게 들린다.
왕의 무덤으로 소개한 안내판을 읽으며 고분의 송림사이로 겅중겅중 접어드는 첩경의 초로草路.
저만치에 부처님 계신다.
좌측 산록의 아랫목을 지켜선 냉곡마애관음보살상冷谷磨崖觀音菩薩像. 그 신수身手의 자비를 여하如何이 맞으랴.
나와 너, 우리들 중생이 숙연하게 몸을 조아린다.
좌우횡렬로 늘어서 있는 10여기의 화강암 바위들. 그 가운데에 우뚝이 솟은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모두가 다 성상聖像인 부처님 모습으로 서 있다.
관음이려니 소리를 내다보는 것이며 동시에 그 파장을 듣고 계심이요 소리로 하여금 세상의 문리를 관장하심이 아니겠는가!
행정구역상 경주시 배동拜洞의 산자락에 있는 삼능골마애관음보살상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손을 내밀어 금방에라도 내려 설듯이 입가엔 지긋이 미소를 머금고서 왼손엔 정병을 들고 머리에는 아미타불상을 화불로 새긴 보관을 섰다.
신라인의 키 높이라도 되는 듯, 1.5m의 보살입상은 전체 높이 약 3m의 바위에 기대서서 전향 관조에 들어있는 중이다.
주변에 협시로 거느린 불성의 바위들과 함께 이 풍진 세상 불협의 악곡을 성화로 지휘하는 듯 자연이 만들어가는 가을서곡에 귀를 적신다.
듣는가? 삼릉골짜기에 무위로 퍼져 울리는 음악, 대자연 찬가를.
가만히 보노라면 바위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니 그 보다는 곡조에 맞춰서 여럿이 함께 춤을 춘다. 소나무 잣나무 할 것 없이 모든 나무들이 흔들거린다. 뒤로는 무대의 배경으로 구름이 지나간다. 빠르게 흐르는 강물 닮았다. 잠깐인 인생이 영원인 듯 착각되는 시간에 각각의 짐승과 새들의 박수를 받으며 우리 모두들 영혼은 한 토막 꿈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하오의 석양이 나뭇잎 사이로 비낄 때 그 빛을 되받아내는 ‘관음’의 표정이란 더없이 밝고 맑아 평온하다.
화평과 충만을 말하는 듯 저 넉넉한 미소의 내면을 무어라 어떻게 측정할까?
이는 가슴을 여는 자에게만이 전해지는 자비한 능력일 것이다. 때문에 어떠한 파란곡절 위기에서도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정성껏 부르기만 하면 부르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구원의 손길이 뻗히게 된다는데…
이제 여름은 갔다.
여름이 생장과 숙성의 시기라면 가을은 결실의 때임을 아는 터.
향과 맛이 안으로 익혀지는 열매의 본질에 대하여 이미 우리가 깨쳐 있어야 할 가을이다.
잔잔한 율동의 솔가지에 해와 달과 별의 진력이 무수하게 맺힐 때처럼 그래야만 우리들 생애의 끝도 역시 눈부신 결과로 아름다울 것이다.
자연이 전해주는 감동의 콘서트. 가을 서곡을 여기 삼릉골 남산에서 자비로운 관음의 빛과 함께 받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