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제(경주고교) 기림사 경내에 매월당영당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보고 매월당 김시습과 기림사가 무슨 인연이 있느냐고 묻는다. 매월당의 인물을 평할 때 반유반승(半儒半僧)이라고 말한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행색은 스님이요, 사상은 선비인 유학자란 말이다. 그가 유불(儒佛)을 두루 섭렵하고 융합하였기 때문에 기림사에서 영당을 건립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본관은 강릉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신동은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다섯 살 때 배우지 않고 모든 이치와 글을 깨우쳐 안다는 생지(生知)를 뜻한다. 우리나라 오세신동은 매월당 한 사람뿐이다. 그는 과거 시험을 위해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사흘 동안 통곡하였다. 보던 책을 모두 불에 태우고 뒷간에 빠져 미친 듯 하다가 삭발하여 중이 되었다.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을 길렀는데, 이를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 한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며 세조 원년(1455) 때의 일이다. 마침내 방랑길에 오른 그는 설잠(雪岑)이라 호를 짓고 작은 행낭을 맨 채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전국 산하를 누빈다. 먼저 관서와 관동 지방을 들러보고, 다시 호남을 답파한 후 경주에 들어오니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는 신라 유적이 산재해 있는 경주를 두루 찾아보면서 역사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꼈다. 경주는 그의 마음을 안온하게 하였다.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금오산 용장사에 들어와 정착하니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다. 당시 용장사는 허물어지지 않았고 스님도 살고 있었다. 승방에서 생활한 그는 이따금 산에서 내려와 교외를 거닐기도 하고 소나무를 보며 음취(吟醉)하였다. 그는 매화 꽃 핀 창가에 달이 막 솟아오른 순간(梅窓月初)의 말을 취해 호를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 한문소설이라 불리는 ‘금오신화(金鰲新話)’ 5편도 이때 지었다. 세상에 어디 맘대로 되는 것이 있었던가? 매월당은 처음 용장사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성종 2년(1472)에 서울로 떠나니 실제 그가 경주에 머문 기간은 7년 남짓하였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정착한 후 환속하고, 다시 장가들어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듯 하였지만 불행은 홀로 오지 않았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 살 때 2차 방랑 길에 올랐다. 지난번 방랑할 때와 사뭇 다른 몸과 마음은 지쳤다. 나라 안에 지음(知音)이라곤 없었다. 다시 10년 간 돌아다니다 부여군 홍산 무량사에 머물다 세상을 뜨니, 쉰아홉 살이었다. 현종 11년(1670)에 경주 부사 민주면이 부임해 왔다. 그는 매월당의 맑은 지조와 곧은 충절을 매우 숭앙하였다. 민주면은 경주 선비들과 상의한 후 용장사 곁에 매월당영당 3칸을 건립하였다. 매월당은 자신의 노소(老少) 때 모습을 직접 그린 초상화 2본을 남겼다. 그 영정이 동학사에 있었는데 이를 모사하여 용장사 매월당영당에 봉안하고 경주부가 주관하여 제사를 올렸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가 부임하여 영당에 위패를 모셔두고 향사를 지냈다.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경주에는 서악서원과 옥산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헐렸다. 서원 훼철이란 묘우 곧 위패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당시 매월당사(梅月堂祠)의 모습을 어떠했을까? 용장사는 허물어져 없고 스님도 떠난 지 오래되었다. 영정은 흐릿하고 기우러져 가는 뜰 앞에 잡초만 무성하였다. 이 틈을 타고 주변 마을의 몇 사람들이 올라와 제기 등을 훔쳐가 팔아먹었다. 고종 15년(1878)에 부윤 민창식이 부임하여 매월당사가 이같이 훼손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관련자를 모두 색출하여 배상하였다. 영당이 너무 깊은 산골에 있어서 관리가 쉽지 않다 하여 옮기기로 하였다. 처음 물색한 곳은 관아 내에 공간을 마련하려 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당시 기림사에는 스님들이 절을 잘 관리하고 있었고,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외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영정을 기림사 경내에 영당을 지어 봉안하기로 하였다. 용장사 영당에 따른 토지를 모두 매각하고, 앞서 환수한 금액까지 합하니 771냥이었다. 영당을 건립하고 제기와 제상 등을 새로 구입하였다. 남은 금액으로 3건의 토지를 매입하여 영당 제전(祭田)으로 삼고 기림사에서 경작하였다. 그 해 8월에 영정을 이봉한 뒤 부윤 민창식이 고유하였다. 매월 삭망에 분향하고,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 지낼 때 제수는 모두 기림사에서 준비하도록 하였다. 경주부와 기림사는 이를 서로 약속한다는 문서인 절목(節目) 2건을 작성하여 각각 보관한 것이 아직 전하고 있다. 기림사 매월당영당은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테면 한 경내에서 유불(儒佛)이 공동으로 향례를 치른 문화 공간은 기림사 이외엔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그 의미가 깊은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