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는 불교국가였다. 대자연은 법계法界요 법계의 모든 만상은 부처라던가? 천년침묵, 만년명상으로 정토淨土를 꿈꾸는 변상變相. 동남산東南山 불곡佛谷에 있는 감실부처는 하세월 묵언이다. 한자락 고요와 정적이 천의天衣처럼 휘감기는 저 다소곳한 자태의 독성獨醒. 화강암 덩어리로 조직된 산의 근육이 마침내 한 생명의 존엄으로 일어선다. 단단한 금강(金剛)의 문이 열리고서 사바로 던져지는 초탈의 음성, 아라한의 세상, 아라한의 설법이 들린다. 지금 산중에 흐르는 물소리. 그 소리에 적셔내는 내 목 타는 갈증, 영혼을 깨치는 뜨거운 화두여! 경주시 인왕동 慶州市 仁旺洞 산56번지의 남산불곡 석불좌상南山佛谷 石佛坐像은 국가지정 제198호 보물로써 이는 가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신라미술품의 진수라 할 것이다. 남산 중턱의 학갓들 평지로 오르는 오솔길의 우측, 자북하게 우거진 시누대 숲속에서 숨은 듯 정좌한 부처바위의 기다림, 그 앞의 남쪽으로 펀펀히 길게 뻗은 화강암 바위가 파만경波萬景을 이루었다. 이는 곧 만법귀일萬法歸一의 극변인 불국佛國의 세계와 연결된 상징적 통로로서 부처바위의 높이는 3.2m이고 아래의 하단길이는 4.5m 그 뒤는 낭떠러지형의 자연절벽이다. 조성당시 감실 앞에는 예배의 실내공간인 전실의 구조물을 설치했던 듯 주변의 곳곳에는 부서진 기와조각과 건물 기둥이 세워졌던 초석의 자리가 뚜렷하다. 뿐만 아니라 전실의 지붕에서 받아 흘린 빗물 통로가 확연히 인공의 형질로 남아있어 당시의 우수雨水 관리에 대한 일면이 엿보이기도 하여 이의 건물규모와 기능구조에 대한 추측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위치로 보아서 일상적인 물 사정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듯 싶은 것이 상용의 음용수는 조금 아래에 끼고 도는 산계곡에서 길러다 썼겠지만 그 외의 일반적 허드렛물은 편리상 빗물을 모았다가 쓴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건축물의 관리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그 같은 장치가 필요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바위의 평면 가장자리에 패어진 인공 수로가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방법에 있어 별반 다름없이 대동소이 하다는 데에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감실불의 조성 연대는 6~7세기경으로 진단되는데 이는 불상제작의 기법에서 전성기적 세련미와 활달성 내지는 테크닉이 보이지 않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불상의 형태는 매우 안정적이며 전신에 걸친 옷주름 또한 자태의 편안감을 극대화 시켜주고 있어 기품과 고졸미가 넘쳐난다. 날렵하고 경쾌한 통일기 전후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우아한 미감의 표출, 이것이 시대적 편차를 드러내는 신라미술의 특징이다. 감실여래좌상이 보여주는 극치의 불교미술. 달리 어디에서 이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을까? 감실 앞으로 트인 전실의 바위는 길이가 8m, 너비는 3m 가량이며 지면에서의 높이는 1.5m 정도가 된다. 이보다 더 온화한 표정의 인성미 뚝뚝 흐르는 부처는 아마도 이 세상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석굴양식의 좌표가 되는 시발점일까 마는 석굴암石窟庵은 물론 단석산斷石山의 석굴, 군위의 제2석굴암과 함께 석굴 사원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모델이 되리라 싶다. 소소히 불어가는 대숲의 바람, 그 바람에 무더운 여름 더위를 식혀나 볼까? 셔츠의 윗 단추 하나를 슬그머니 끌어 재친다. 어쩌면 부처도 더우리라. 하건만 담담히 쓸어내리는 표정에는 아까와 지금이 조금도 다르지가 않으니 신기할 따름. 신성에는 속기가 없는가 보다. 그래! 감실부처의 얼굴을 배워서 우리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꼭히 닮아야 할 근원적 모습이지 아니한가? ※ 필자 주 = 지난호(951호) 본문 중 인명 이근창二根昌의 二를 李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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