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이는 시간의 바다,
그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의 운명은 슬프다.
어떤 것이나 간에 잃어버린 실존의 모습을 처음같이 되찾기는 힘든 법,
그러나 우연히 또 무슨 조화로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변천,
이것이 자연적인 인문사人文史의 흐름이다.
때로는 산천의 구름으로 어떤 때엔 한자락 바람 되어 서로 그렇게 만나지는 불가분의 인연들,
남산南山자락 석경石徑의 나무가 그렇고 풀들이 그러하다.
출렁이는 시간의 바다,
그 파도에 휩쓸려 가버리는 것의 운명은 슬프다.
어떤 것이나 간에 잃어버린 실존의 모습을 처음같이 되찾기는 힘든 법,
그러나 우연히 또 무슨 조화로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변천,
이것이 자연적인 인문사人文史의 흐름이다.
때로는 산천의 구름으로 어떤 때엔 한자락 바람 되어 서로 그렇게 만나지는 불가분의 인연들,
남산南山자락 석경石徑의 나무가 그렇고 풀들이 그러하다.
답사에 맞춰서 때마침 만청의 하늘에는 싱그러운 청포도의 영혼, 육사陸史의 초상을 보는 듯 지긋하게 낮달이 걸렸는데 계곡에 얹힌 해탈교解脫橋는 폭포수 물안개로 세심수행洗心修行에 들었다. 지금 촉촉이 젖어 맺히는 자하紫霞의 문,
늘 언제나 토함산 해맞이로 아침을 여는 경주慶州 동남산東南山의 작은 절집 옥룡암玉龍菴, 여기 옥룡암은 일제시대 이전에 이미 사설된 암자로서 법명 만석河萬石 스님이 주실로 있던 곳이다.
만석스님으로 말하자면 벌써 입적한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그리고 경봉스님, 벽안碧眼스님과 함께 일찌기 강원도江原道 금강산金剛山 자락 마하연강원에서 같이 수행했던바 이들 모두는 당시 전국의 불문에 한결같이 학덕을 떨치던 엘리트 승려였다.
그런데 이 절에 독립투사요, 민족적 저항시인이었던 육사陸史가 한동안 머무르며 시詩작 활동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보건데 앞서 말한바 학업과 수행에 있어 불가佛家의 지도급에 있었던 이분들과의 신분상 유대도 결코 무관치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육사도 역시 건천乾川의 화천리花川里에 있던 민족지사 고암古菴 박곤복朴坤復과도 밀접한 친교를 가지면서 서로 내왕하며 문학을 논하던 처지였다.
그러나 기실은 시詩 보다도 독립투쟁의 목적이 먼저였던 것으로 보인다.
육사陸史의 본명은 이원록李源錄, 1904년 4월 4일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다.
그 뒤 1925년에 그의 형인 원기源棋와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大邱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함으로써 일본 형사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피신, 은거하다시피 경주에 머물게 된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오늘같이 무더운 7월 한여름 밤,
옥룡암 한쪽 비탈에 기대인 듯 초라한 기와집 요사채에서 섬돌아래 애끓는 귀뚜리 울음을 벗 삼아 지새웠으려니 빼앗긴 나라, 민족의 설움과 통한을 시로써 달래며 승화시켰을 육사의 고육지책, 차마 그냥은 견디지 못해 한결같이 기대하는 이상세계로 향하여 피를 토하듯 뱉어낸 음성이 들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생일대 그의 대표 시詩, 한송이의 「청포도」가 그즈음에야 비로소 달콤한 향미로 영글었으리라.
-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 하면서 날이 새기까지 한동안 눈을 감고 육사는 격정에 겨워 남몰래 흐느꼈을지도 모른다.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쪽빛 푸른 바다는 당시에 포항의 도구해변으로 가끔 출입했던 정황에 비추어 보아 분명 그 바다였음이 틀림없을 것 같다.
밤마다 산은 한없이 별빛을 받아 내려서 한 방울 맑은 이슬에 술인 듯 재웠으랴만 처륵처륵 흐르는 계곡물 소리 심연에 스며 아련히 취하게 한다.
이 무렵 육사는 서울의 성모병원에서 퇴원, 일본 관헌의 감시를 몰래 벗어나 옥룡암 승방으로 내려와 요양차 숨어 지냈다.
병석에 누웠던 뒤끝이라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육사의 몸, 고암은 물론 서울의 신석초申石艸 경주의 김범부金凡父 등이 자주 그 곁을 찾아와 위문하기도 했다.
특히 고암은 상시로 함께 기거하며 병 구환과 조석을 도왔으니 이만한 우정이 어디에 있을까? 또 고암은 육사의 권유로 오며가며 짬을 낸 시간에 영제永齊 이근창二根昌의 한문본 저항시 「왜馬行(말먹이는노래)」을 우리 가사체로 번역하게 되는데 책이 끝날 무렵쯤 고암도 병마에 시달리게 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때에 육사가 또 경주를 떠나자 고암은 육사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번역본의 마지막 장에다 그 허무를 적어 내렸다.
「임오 첫가을, 밤차로 벗을 멀리 보내고 외로운 비 오는 금오산金鰲山 암자 한 옆방에서 역자는 ....」하고서 후문을 적었다.
슬픔이라기보다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멀리 보내야 했던 벗, 이육사 그들의 투사적 동지애와 문학적 친구로서의 애끓는 정리가 왜마행의 번역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신라유적을 사이사이 갈비뼈 안에 감춘 듯 소나무와 잡목이 뒤엉킨 울울청청한 금오산의 품 너른 가슴,
옥룡암도 함께 만세불변의 경전을 펼치는 듯 일몰의 사색을 준비하느라 섬섬이 바쁘다.
청포도의 산실, 여기 옥룡암 앞뜰에
육사의 투혼과 문학정신을 새겨 표징의 빗돌로 세우노라.
- 2010년 여름 청포도 시詩 현창 동인회 -
답사에 맞춰서 때마침 만청의 하늘에는 싱그러운 청포도의 영혼, 육사陸史의 초상을 보는 듯 지긋하게 낮달이 걸렸는데 계곡에 얹힌 해탈교解脫橋는 폭포수 물안개로 세심수행洗心修行에 들었다. 지금 촉촉이 젖어 맺히는 자하紫霞의 문,
늘 언제나 토함산 해맞이로 아침을 여는 경주慶州 동남산東南山의 작은 절집 옥룡암玉龍菴, 여기 옥룡암은 일제시대 이전에 이미 사설된 암자로서 법명 만석河萬石 스님이 주실로 있던 곳이다.
만석스님으로 말하자면 벌써 입적한 청담스님과 성철스님 그리고 경봉스님, 벽안碧眼스님과 함께 일찌기 강원도江原道 금강산金剛山 자락 마하연강원에서 같이 수행했던바 이들 모두는 당시 전국의 불문에 한결같이 학덕을 떨치던 엘리트 승려였다.
그런데 이 절에 독립투사요, 민족적 저항시인이었던 육사陸史가 한동안 머무르며 시詩작 활동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보건데 앞서 말한바 학업과 수행에 있어 불가佛家의 지도급에 있었던 이분들과의 신분상 유대도 결코 무관치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육사도 역시 건천乾川의 화천리花川里에 있던 민족지사 고암古菴 박곤복朴坤復과도 밀접한 친교를 가지면서 서로 내왕하며 문학을 논하던 처지였다.
그러나 기실은 시詩 보다도 독립투쟁의 목적이 먼저였던 것으로 보인다.
육사陸史의 본명은 이원록李源錄, 1904년 4월 4일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다.
그 뒤 1925년에 그의 형인 원기源棋와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大邱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함으로써 일본 형사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피신, 은거하다시피 경주에 머물게 된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오늘같이 무더운 7월 한여름 밤,
옥룡암 한쪽 비탈에 기대인 듯 초라한 기와집 요사채에서 섬돌아래 애끓는 귀뚜리 울음을 벗 삼아 지새웠으려니 빼앗긴 나라, 민족의 설움과 통한을 시로써 달래며 승화시켰을 육사의 고육지책, 차마 그냥은 견디지 못해 한결같이 기대하는 이상세계로 향하여 피를 토하듯 뱉어낸 음성이 들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생일대 그의 대표 시詩, 한송이의 「청포도」가 그즈음에야 비로소 달콤한 향미로 영글었으리라.
-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 하면서 날이 새기까지 한동안 눈을 감고 육사는 격정에 겨워 남몰래 흐느꼈을지도 모른다.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쪽빛 푸른 바다는 당시에 포항의 도구해변으로 가끔 출입했던 정황에 비추어 보아 분명 그 바다였음이 틀림없을 것 같다.
밤마다 산은 한없이 별빛을 받아 내려서 한 방울 맑은 이슬에 술인 듯 재웠으랴만 처륵처륵 흐르는 계곡물 소리 심연에 스며 아련히 취하게 한다.
이 무렵 육사는 서울의 성모병원에서 퇴원, 일본 관헌의 감시를 몰래 벗어나 옥룡암 승방으로 내려와 요양차 숨어 지냈다.
병석에 누웠던 뒤끝이라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육사의 몸, 고암은 물론 서울의 신석초申石艸 경주의 김범부金凡父 등이 자주 그 곁을 찾아와 위문하기도 했다.
특히 고암은 상시로 함께 기거하며 병 구환과 조석을 도왔으니 이만한 우정이 어디에 있을까? 또 고암은 육사의 권유로 오며가며 짬을 낸 시간에 영제永齊 이근창二根昌의 한문본 저항시 「왜馬行(말먹이는노래)」을 우리 가사체로 번역하게 되는데 책이 끝날 무렵쯤 고암도 병마에 시달리게 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때에 육사가 또 경주를 떠나자 고암은 육사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번역본의 마지막 장에다 그 허무를 적어 내렸다.
「임오 첫가을, 밤차로 벗을 멀리 보내고 외로운 비 오는 금오산金鰲山 암자 한 옆방에서 역자는 ....」하고서 후문을 적었다.
슬픔이라기보다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멀리 보내야 했던 벗, 이육사 그들의 투사적 동지애와 문학적 친구로서의 애끓는 정리가 왜마행의 번역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신라유적을 사이사이 갈비뼈 안에 감춘 듯 소나무와 잡목이 뒤엉킨 울울청청한 금오산의 품 너른 가슴,
옥룡암도 함께 만세불변의 경전을 펼치는 듯 일몰의 사색을 준비하느라 섬섬이 바쁘다.
청포도의 산실, 여기 옥룡암 앞뜰에
육사의 투혼과 문학정신을 새겨 표징의 빗돌로 세우노라.
- 2010년 여름 청포도 시詩 현창 동인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