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제(경주고등학교 교사)
옛 경주여중 교사 동편 북성로 95번길을 따라 계림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중간 지점에 철책으로 둘려 쌓인 돌 더미가 있다. 자세히 보면 외형은 4각형 터널 모양으로 구축되어 있고, 겉보다 내부가 훨씬 더 정교하게 쌓았다.
석조물 전체 높이는 약 3미터, 남북 길이는 약 8미터, 동서 길이는 약 6미터이다. 장방형으로 거대한 석재로 운반하여 쌓았는데, 덮개 돌은 장대석 또는 당간주를 가져와 얹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나라를 자손만대에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새 왕조에 대해 민심을 집약시킬 수 있는 어떤 상징성과 구심점이 필요하였다.
고려는 망했으나 민심은 여전히 전조(前朝)를 동경하고 있었고, 새 왕조의 전통성 결여가 이태조의 마음을 또한 무겁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전국 주요 고을에 이성계의 영정 곧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
개성에 목청전(穆淸殿), 영흥에 선원전(璿源殿), 전주에 경기전(慶基殿), 경주에 집경전(集慶殿)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조선 전기 경주에 관해 기사 중 집경전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이 때문이다.
태조 어진을 경주에 봉안하는 최초의 기사는 태조 13년(13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는 판삼사 설장수를 시켜서 자신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형조전서 이귀령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로써 경주에 진전(眞殿)이 설립되었다.
세종 24년(1442)에 전주 경기전, 평양 영숭전과 같이 ‘집경전(集慶殿)’이란 전호를 내리고, 전 지기 2명을 두었다. 경기전은 집경전의 규모를 본떠 세웠다.
그런데 본 석조물의 축조 연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태조와 세종 연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처음 어진은 목조 와가의 전각에 봉안했다가 만세 불후를 고려하여 돌로 쌓았을 것이다.
지금 석조물을 세로로 지어 있는데 건축상 그 구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조선 시대 왕릉 재사는 정자각(丁字閣)이다. 곧 ‘丁’ 자 모양으로 건물을 지은 데서 부른 말이다.
정(丁) 자는 문명과 발전을 의미한다. 현재 전주 경기전의 건물도 ‘丁’ 자 모양이다. 세로로 통해 전각 안으로 들어가면 ‘一’ 자 형의 건물 가운데 어진을 모셔 두었다.
석조 건물은 본전(本殿)으로 견실하게 축조한 것이지, 참봉 등이 거처하는 부속건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은 석조물은 본전의 일부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다.
곧 ‘丁’ 자 건물의 세로 구조물인 것이다. 어진이 온습에 잘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一’ 자 형 목조 건물로 지었고, 입구 건물은 돌로 쌓았던 것이다. 1987년 12월에 이곳을 발굴한 결과 ‘一’ 형 건물 터는 발견되지 않았고, 반대편에 건물 터가 있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민가 중심지에 있었던 집경전 터는 많은 훼손이 있었을 것이고, 읍성을 축조하면서 많은 석재가 필요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경주 객사 동경관의 대청과 같은 자오선 위치에 있다. 객사는 관원이나 내빈이 유숙할 뿐 아니라 금상(今上) 전하의 위패를 봉안한 전패(殿牌)가 있었다. 객사에서 보면 전패 뒤 2백 미터 지점 집경전에 태조 어용을 봉안하고 있어서 일체이위(一體二位)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경전은 조선 시대 경주 최고의 성역(聖域)이며 신성시하였다.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 성전보다 훨씬 더 숭배의 장소가 되었다.
부윤이 부임하면 이곳부터 먼저 배알하였고, 관찰사가 순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조 29년(1462) 부근에 사는 양민 20명을 차출하여 돌아가며 수직하게 하였다.
예종 1년(1469) 제향을 받들 때 시계가 없어서 때를 놓친 일이 있다. 따라서 공조에서 물시계(누각:漏刻)와 해시계(일영:日影)를 만들어 보냈다.
성종 25년(1494) 객사에 화재가 났을 때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 집경전에 위안제를 지냈고, 명종 7년(1552) 12월에 객사에서 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청과 서루 등이 전소하였다.
화재를 진압할 때 선령(先靈)이 놀랬다 하여 도승지 권철을 보내 위안제를 올렸는데, 이때 제문은 퇴계 이황이 지었다.
임진년(1592) 왜란이 일어나자 어진부터 서둘러 옮겼다. 전 참봉 정사성과 홍여률이 어진을 양동 수운정에 임시 대피시켰다가 안동 도산서원에 모시었다.
사태가 위급하자 다시 영월을 거쳐 강릉 객사 임영관으로 옮겼고, 그 후 임영관 옆에 집경전을 지어 어진을 봉안하였다.
인조 9년(1631) 3월에 강릉 집경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어진은 소실되고 말았다. 인조는 그 책임을 물어 강릉부사 민응형에게 곤장 1백대를 때리고 2천 밖으로 유배시켰다. 태조 어진의 위상과 의미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주 집경전은 임란 병화로 석조물만 남겨두고 거의 불에 탔다. 이 후 경주 인사들은 여러 차례 나라에 글을 올려 집경전 재건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조 22년(1798) 4월에, 정조는 경주 인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어진을 다시 봉안하지 않고,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다섯 글자를 직접 써서 그 자리에 비를 세우게 했다.
경주 부윤 류강이 비각을 건립한 뒤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를 그려 나라에 받쳤는데, 이는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다.
이로써 경주 집경전은 전각 일부 건물인 석조물과 정조 어필 비각이 세워졌다. 지금 석조물은 건재하지만 비각은 일제 말기 화재로 소실되고 비신만 방치되어 있다.
1987년 발굴할 때 지상 석조물을 해체 복원한 뒤 조사 결과는 엉뚱하게도 주전소(鑄錢所) 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안내판을 붙였다.
신성에 대한 모독이다. 이 같은 역사 문화에 대한 단견은 게시되어 있어서 안타깝고, 집경전 복원에 대해 중지를 모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