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처럼 서려있는 산허리의 운무
저 깊숙한 골짜기의 응달에서 심오한 궁창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온다.
이끼층의 습한 토양이 뿜어내는 시큼한 냄새
어쩌면 그것은 아득한 태고적 원시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산중협곡의 빽빽한 수림, 동학東學의 발상지, 용담정龍潭亭 가는 길에 성하의 녹음이 짙었다.
신비처럼 서려있는 산허리의 운무
저 깊숙한 골짜기의 응달에서 심오한 궁창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온다.
이끼층의 습한 토양이 뿜어내는 시큼한 냄새
어쩌면 그것은 아득한 태고적 원시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산중협곡의 빽빽한 수림, 동학東學의 발상지, 용담정龍潭亭 가는 길에 성하의 녹음이 짙었다.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깨침, 용담수도원, 그 도량으로 들어서는 포덕문布德門,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慶州市 見谷面 稼亭里의 해발 594m인 구미산龜尾山은 국립공원에 속한 지역으로서 산세의 웅자함이 성지聖地로서의 면모를 받쳐주기에 어느 하나 손색없는 곳이다.
이 자리의 지맥 활동이 여간치 않아 보인다.
지난至難한 고통의 길,
후천개벽의 진리를 구하려고 주유팔로周遊八路를 순회한 대신사大神師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행각,
‘사람은 모두 다 한울님을 뫼심으로 하여 양반도 천민도 없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의 뿌리내림, 천도교天道敎 그 강목講目의 교당敎堂이 이곳 명산에 몸으로 섰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는 1824년 10월에 영남일대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치던 가정리의 산림처사山林處士였던 가난한 선비 최옥崔玉과 재가녀인 한韓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군공한 집안 살림과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의 장애로 하여 울분과 좌절의 성장기를 겪어야 했다.
때문에 일찍이 난세의 극복을 위한 대망의 뜻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빈부고하의 차이 없이 사람들 모두 다 평등하게 살 수는 없을까?
어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고서 이때부터 두루 세상을 돌아보며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던 어느 봄날 대신사 수운은 처가 곳인 울산蔚山에 당도하여 머물게 되는데
그곳의 인근인 여시바윗골에 있는 한 정자에서 하루를 소일하던 중에 우연히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으로부터 하늘의 글이라는 천서天書를 받는다.
그 천서의 구체적 기록은 지금은 알 수 없으나 다만 핵심의 요지는 기천祈天, 즉 하늘에 기도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옳지, 이것이로구나! 하고서 대신사 수운께서는 진리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안으로부터 구해야 된다는 것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그때 이후 양산梁山의 천성산千聖山 또는 적멸굴寂滅窟 같은 곳에서 수행하던 끝에 마침내 태생지인 경주에 귀환하여 구미산 남쪽의 심산유곡 용담정에서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이때가 1860년 천도교 효시, 포덕 원년이 되는 해, 교도들 스스로가 말하는바 한국에서 꽃피운 우주적 차원의 세계종교로 막 부상한 셈이다.
용담정, 그 암벽에 흐르는 찬물,
선경의 청수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서 보니
산봉우리 가이없는 하늘에 흰구름 유유히 떠간다.
오! 여기 늠름호장한 최제우 대신사 동상,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내 몸에 뫼셨으니 사근취원 하단 말가.”
하건만 대신사께서는 당시의 집중된 조정의 탄압으로 하여 마침내 포덕 4년인 1863년의 겨울, 조선조 선전관 정운구鄭雲龜 일행에 붙잡혀서 대구大邱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명을 쓰고 포덕5년인 1864년 봄에 대구의 장대將臺에서 참형을 당하고 만다.
억울하다. 참으로 비분강개할 노릇이다. 1세 교주 최제우崔濟愚,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 4세 교주 박인호朴寅浩 그렇게 맥이 살아 오늘의 임운길 교령이 있기까지 151년 포덕역사를 이어왔다.
동학사상이 없고서야 어찌 3.1독립운동이 있었을 것이며 또 3.1운동이 없고서야 상해 임시정부인들 그렇듯 빨리 있기나 했으랴.
이로서 8.15 해방의 광복도 역시 당연히 따라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민족운동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에서 가져보게 되는 오늘 이 감회를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인 3경三敬사상의 천도교,
다시 또 세연에 이끌려 포덕문을 나서는 필자筆者의 발자국 뒤에 조랑조랑 딸려서 오는 개울물 소리의 긴 향음響音.
※시천주侍天主 =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 즉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이
다른 초월적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에 모시고 있다는
깨우침의 소리. 천도교 경전의 용어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깨침, 용담수도원, 그 도량으로 들어서는 포덕문布德門,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慶州市 見谷面 稼亭里의 해발 594m인 구미산龜尾山은 국립공원에 속한 지역으로서 산세의 웅자함이 성지聖地로서의 면모를 받쳐주기에 어느 하나 손색없는 곳이다.
이 자리의 지맥 활동이 여간치 않아 보인다.
지난至難한 고통의 길,
후천개벽의 진리를 구하려고 주유팔로周遊八路를 순회한 대신사大神師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행각,
‘사람은 모두 다 한울님을 뫼심으로 하여 양반도 천민도 없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의 뿌리내림, 천도교天道敎 그 강목講目의 교당敎堂이 이곳 명산에 몸으로 섰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는 1824년 10월에 영남일대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치던 가정리의 산림처사山林處士였던 가난한 선비 최옥崔玉과 재가녀인 한韓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군공한 집안 살림과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의 장애로 하여 울분과 좌절의 성장기를 겪어야 했다.
때문에 일찍이 난세의 극복을 위한 대망의 뜻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빈부고하의 차이 없이 사람들 모두 다 평등하게 살 수는 없을까?
어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고서 이때부터 두루 세상을 돌아보며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던 어느 봄날 대신사 수운은 처가 곳인 울산蔚山에 당도하여 머물게 되는데
그곳의 인근인 여시바윗골에 있는 한 정자에서 하루를 소일하던 중에 우연히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으로부터 하늘의 글이라는 천서天書를 받는다.
그 천서의 구체적 기록은 지금은 알 수 없으나 다만 핵심의 요지는 기천祈天, 즉 하늘에 기도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옳지, 이것이로구나! 하고서 대신사 수운께서는 진리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안으로부터 구해야 된다는 것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그때 이후 양산梁山의 천성산千聖山 또는 적멸굴寂滅窟 같은 곳에서 수행하던 끝에 마침내 태생지인 경주에 귀환하여 구미산 남쪽의 심산유곡 용담정에서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이때가 1860년 천도교 효시, 포덕 원년이 되는 해, 교도들 스스로가 말하는바 한국에서 꽃피운 우주적 차원의 세계종교로 막 부상한 셈이다.
용담정, 그 암벽에 흐르는 찬물,
선경의 청수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서 보니
산봉우리 가이없는 하늘에 흰구름 유유히 떠간다.
오! 여기 늠름호장한 최제우 대신사 동상,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내 몸에 뫼셨으니 사근취원 하단 말가.”
하건만 대신사께서는 당시의 집중된 조정의 탄압으로 하여 마침내 포덕 4년인 1863년의 겨울, 조선조 선전관 정운구鄭雲龜 일행에 붙잡혀서 대구大邱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명을 쓰고 포덕5년인 1864년 봄에 대구의 장대將臺에서 참형을 당하고 만다.
억울하다. 참으로 비분강개할 노릇이다. 1세 교주 최제우崔濟愚,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 4세 교주 박인호朴寅浩 그렇게 맥이 살아 오늘의 임운길 교령이 있기까지 151년 포덕역사를 이어왔다.
동학사상이 없고서야 어찌 3.1독립운동이 있었을 것이며 또 3.1운동이 없고서야 상해 임시정부인들 그렇듯 빨리 있기나 했으랴.
이로서 8.15 해방의 광복도 역시 당연히 따라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민족운동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에서 가져보게 되는 오늘 이 감회를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인 3경三敬사상의 천도교,
다시 또 세연에 이끌려 포덕문을 나서는 필자筆者의 발자국 뒤에 조랑조랑 딸려서 오는 개울물 소리의 긴 향음響音.
※시천주侍天主 =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 즉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이
다른 초월적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몸에 모시고 있다는
깨우침의 소리. 천도교 경전의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