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에서 생금生金을 보랴.
금생려수金生麗水요 옥출곤강玉出崑岡인 듯 경주慶州의 남산南山에는 많은 보물과 신화가 숨겨져 있다.
사방팔방에 40여 계곡을 거느린 남산은 지금까지 1백 10개소가 넘는 절터와 61기의 석탑을 비롯 78체가 되는 불상이 발견된 곳으로서 이야말로 노천박물관이나 다름없는 신라유적의 보고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빼어난 서남산西南山의 포석鮑石계곡은 전체의 길이가 장장 2.5km에 달하는 긴 골짜기로서 이 골짜기의 초입인 배동拜洞 454의 1번지, 천년사직 신라新羅가 절명한 여기에 포석정지鮑石亭址, 그 유허는 묵묵부답 말이 없다.
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들은 저들끼리만 통하는 듯 서로 마주 보는 눈짓으로 순간의 텔레파시를 전할뿐인데 가끔은 사이클이 맞지 않는 나뭇잎 안테나가 파르르 나부껴 땅위에 떨어지기도 한다.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은 성남城南의 이궁지離宮址로써 임금이 한 번씩 행차할 때에 별궁으로 활용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확실한 기능과 건축규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조성연대 마저도 알 수가 없는 채 다만 제49대 헌강왕憲康王(876-886)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포석정지에 대한 1차 발굴당시 포석사鮑石祠라는 명문의 기와편이 발견됨으로서 이곳이 남산성과 깊이 관련된 그 어떤 제사의 목적을 가진 사당이었으리라 그렇게 보는 학자들도 몇몇 있어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55대 경애왕景哀王의 비극적 말로를 빚어낸 결과에 비추어 왕이나 귀족들의 연회장소인 놀이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번은 헌강왕이 신하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향연을 베풀게 되었다.
이때에 홀연히 남산신南山神이 출현하여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왕은 신하들의 연회를 한동안 멈추게 하고 혼자 끝까지 지켜보았으나 신하들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았다.
춤이 끝나고 그제서야 주연을 계속하게 하자 신하들이 왕에게 여쭈었다.
‘무슨 일로 연회를 한동안 멈추게 하였나이까?’ 하고 물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흥겹게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라고 하자 ‘남산신은 어떤 춤을 보여주셨는지요?’ 하며 되물은즉 헌강왕이 스스로 그 춤을 흉내 내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이후에 그 춤은 전국에 널리 퍼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니 고려 때까지 행해졌다고 한다.
상심무라고 했던가?
이는 필경 신라의 국운을 살펴주는 상서로움의 춤이었을 것이니 남산신이 나라와 함께 함으로써 이때까지만 해도 국력의 토대가 튼튼하여 흔들림 없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지금은 정교한 조각 솜씨로 남아있는 석조유물, 그 형태가 전복껍질 모양처럼 꾸불꾸불하게 홈이 파져있어 포석정이라 했다는데 입수부에서부터 물을 흘리고 여기에 술잔을 띄워 청빈의 앞앞에 돌렸으려니 이 얼마나 풍아한 멋이며 세상에 다시없을 한국적 낭만의 효시인가 싶어 절로절로 유발되는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오! 신라인, 그 놀라운 슬기와 예지로 찬란한 사회문화, 황금나라의 정신지도를 그려낸 우리의 뼈, 혈관, 맥박, 그 선조들의 차원 높은 동양사상東洋思想이여.
포석정, 이 자리에 빗돌하나 세우노니 상심무의 춤사위처럼 고고한 이의 시각에만 보여지게 될것인저 굳이 무슨 명문이 필요하랴,
현재 포석마을의 동북쪽에는 배성못이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이는 포석정의 돌 홈에 물을 끌어들이는 수원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또한 북쪽의 개울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 산성山城의 남쪽인 이궁의 터라고 전해온다.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861-875)때에 당나라로 가서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신라사람 최광유崔匡裕의 포석정 주악사奏樂詞라는 시 한편이 전해 오는데 역해만 적어볼 뿐 원문은 생략한다.
“기원사祈園寺 실제사實際寺 화려한 두절이 동서로 있는데 그 가운데 자리하여 포석정이 있다네.
소나무 잣나무 서로 어울려 무성한데 넝쿨은 온통 하늘을 덮었구려. 머리를 휘둘러보는 곳마다
진달래꽃 피고 피어 짙붉은 웃음 골짜기에 가득차서 넘네, 으스럼 실안개가 서기처럼 자욱히
비껴 있는데.”(포석정 시詩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