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으로 남아 있는 그 어떤 종적 위에 따사로이 내려앉는 빛의 은혜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체념일 것이다. 용서일 것이다. 왕의 존엄을 지켜 스스로가 선택한 자진의 길, 여기 경애왕景哀王 처연히 잠들다. 경주慶州의 서남산西南山 배동拜洞 73의 1 천년 노송들을 뒤로 거느려 초빈처럼 복배한 땅집. 지금 이 삼릉三陵골에 올린 홍동백서紅東白西, 흠향의 제목을 아는가? 무어라 돌아서면 등 뒤에 따르는 끈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데 무위로 일렁이는 솔바람만 서늘히 산자락에 감기어 든다. 삼릉계곡은 달리 냉골冷谷이라는 별칭을 가졌는데 남쪽방향 삿갓골로도 향하는 이곳에 신라新羅 55대 경애왕의 것이라 전하는 무덤, 독릉獨陵이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앉았다. 이때쯤 신라 세력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쇠락기에 이르렀건만 어느 날 포석정鮑石亭에서는 왕과 신하들의 주연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갑자기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에 포위되어 최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운명, 이로 하여 비참한 나라의 말로를 자초하면서 사나운 외세에 휩쓸리어 폭풍속의 낙화처럼 박씨朴氏성의 마지막 왕조는 그렇게 비운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세세대대世世代代 천년의 연륜을 짐 지고서 다시 천년을 이곳에 버티어 존재하는 기백, 남산의 푸르름, 이 어찌 패망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일 뿐이랴. 경애왕릉, 이를 에워싼 우람한 송림의 솔 향에 지금 우리는 취한다. 꿈결인 듯 그윽히 취해서 황홀하게 어리비치는 왕조의 문화 역사를 찬사하게 되는 것이 다시는 그 나라로 돌아갈 수 없음에서이다. 더군다나 쑤-아 쑤-아 소리 내며 스쳐가는 바람의 운율, 바람은 시가 되고 수필이 되고 또 간찰이 되어 마침내 그 연속인 숲의 속삭임으로 차분히 가슴에 침윤되기까지 한다. 그런 자연의 노래, 그 아름다움인 절정의 선율로 변주되어지는 까닭에서이기도 하다. 짙푸른 그늘의 송림을 벗 하랴. 여기 함께 오래 머물러 영혼을 씻어 가진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어디 그렇게 우리들 삶이란게 원처럼 뜻처럼 되어 지던가 말이다. 흘흘忽忽 한세월 그저 한번 씩 와서는 잠시 어울렸다 떠나는 것만으로도 족히 청복인 것으로 여길 줄 아는 참 지혜가 이때에 더욱 필요한 법. 좋겠다. 이 고적한 숲속에서 솔바람 서라벌徐羅伐악부를 더듬으며 끝없는 몽환의 잠, 영원의 안식으로 거하는 경애왕이 오늘따라 왠지 부럽기 그지없다. 송림은 숲의 향기뿐만 아니라 토사의 기운마저 머금어서 토해낸다. 그 깊숙이 내린 흙속의 뿌리로 산이 가진 원력을 빨아내어 사방팔방으로 흐트린다. 여기 저기 바람에 얹어 뿌리는 에너지의 파종, 놀랍게도 그 힘은 우리들 머릿속 수만 가지 어지러운 고뇌를 산뜻하게 청소한다. 왜 여긴 오래된 침묵만으로도 평화로운가? 눈감은 지하의 혼령, 몇 마디의 짧은 진혼곡을 경애왕 그의 땅집으로 내리는 날, 산록을 넘어서 오는 바람꽃의 청순한 몸짓도 함께 부연해 보내고 싶다. 솔밭을 벗어나면서 이용휴李用休(1708-1782 숙종34-정조9)의 시 「석류꽃집」에 대한 암송, 이 여흥을 어찌할까? 松林穿盡路三? 立馬坡邊訪李家 田夫擧鋤東北指 鵲巢村養露榴花 솔밭 길을 벗어나자 길은 세 갈레 언덕 가에 말 세우고 이처사댁을 묻노라니 농부는 호미 들어 동북쪽을 가리키며 ‘까치집 있는 마을 석류꽃 핀 집’이라네 송림을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인사. 안녕! 경애, 경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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