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제(경주고 교사) 조선시대 경주지역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지만 학문과 중망으로 이름이 가장 높았던 선비를 꼽으라면 필자는 화계 유의건을 빼놓을 수 없다. 화계(花溪) 유의건(柳宜健, 1687~1760)의 본관은 서산이고 내남면 화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난 그는, 경전과 역사 뿐 아니라 율력(律曆) 및 점술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하였다. 화계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해 명절에 화계는 술을 먹고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보고 나무라자 화계는 평생 어른들 앞서서 술을 마시지 않았고, 누가 억지로 권하면 한 잔을 넘지 않았다. 숙종 39년(1713) 경주지역에 돌림병이 크게 나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화계의 부모와 아우는 당시 역질로 죽었고, 화계도 감염되었다. 그는 의식을 잃고 한 달 동안 누워 신음하자 주위 사람들이 흰 모자를 그의 머리에 덮어씌워 바람을 막았다. 정신이 깨어난 화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저가 왜 흰옷을 입고 있습니까?”고 큰소리를 지른 후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났다. 화계는 역학(易學)에 밝았고 특히 술(術)을 잘하였다.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간혹 손님이 찾아오면 아내가 끼니를 걱정하였다. 화계는 고민하다가 뒤뜰에 나가 산을 바라보며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헌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온 산천에 살고 있는 새들이 곡식 한 알씩 입에 물고 마당에 모이는 것이 아닌가? 화계는 이를 거둬 밥지어 손님을 대접하고 남은 곡식은 뒤뜰에 나가 도로 뿌렸다. 아내가 그 이유를 물으면 화계는, 사람이 곡식을 다 먹으면 새들이 크게 굶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나무 껍질로 만든 벼루집을 화계에게 선물하였다. 화계는 명(銘)을 짓고 매역(梅易)으로 점을 친 후 “경진년에 이 물건은 주인을 잃게 될 것이고, 내 수명도 다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경진년(1760)에 화계는 남산 천룡사에서 피역(避疫)하며 신음하다가 사위 남용만을 불러 “옛날 후한 때 정현(鄭玄)은 정묘년(127)에 태어나서 경진년(200) 7월에 죽었다. 내가 그의 학문에는 못 미치지만 평생 일을 생각해 보면 비슷한 데가 많다. 그 생졸(生卒)도 또한 같으니 어찌 이상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는데, 과연 그 해 7월 19일에 죽었다. 그 날 저녁 화계가 평소 사용했던 벼루는 어느 사람의 실수로 그만 땅에 떨어뜨려 깨어졌다. 그런데 벼루 뒷면에 ‘물여인망(物與人亡)’이란 네 글자가 쓰여져 있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 경주 사람들은 그를 ‘동방강절(東方康節)’이라 일컬었다. 이 해 봄에 화계(花溪) 뒷산이 홀연 무너지면서 그 소리가 몇 리까지 들렸고, 그가 살던 난실(蘭室)은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기울어졌다. 앞서 화계는 을묘년(1735)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가 죽기 몇 년 전에 이덕록 손경걸 등과 같이 사마소를 중건하였다. 그리고 화계가 중수기문을 지었는데 이는 지금도 사마소 강당에 걸려있다. 화계는 유명한 ‘나릉지안설’을 지었다. 당시 신라 왕릉의 비정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한 진위를 논한 글이다. 그외에도 주옥같은 많은 시를 남겼고 역학에 관한 글도 다수 전한다. 그는 옥산서원 원장을 무려 네 번이나 역임하면서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앙되었다. 화계 문하에 많은 유생들이 모여들었고 그 가운데 통도사 승려들도 있었다. 그는 문인들과 같이 화곡 개울가에 화계서당(花溪書堂)을 설립하고 강당을 문회암(文會庵), 서재를 난실(蘭室)이라 편액하였다.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던 화곡은 화계서당으로 말미암아 글 읽는 소리가 맑은 계곡을 따라 흘러 넘쳤다. 뿐만 아니라 시인 묵객들의 내방도 끊이지 않아 화곡은 백화만개(百花滿開)의 시대를 맞았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보문에 살았던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 1709~1784)은 화계보다 스물두 살 아래지만 막역한 문우(文友)이었다. 활산이 상처하고 혼자 지내자 화계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따라서 문우 사이에서 옹서(翁壻) 관계가 되었다. 활산은 유씨 부인을 얻어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 1748-1812)를 낳았다. 치암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정언에 이르렀으며, 그의 외손자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영남의 많은 선비들로 추앙을 받았던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 1799~1870)이다. 이를테면 화계에 의해 경주 유맥(儒脈)의 한 줄기를 크게 형성하며 전승하였다. 정조 16(1792)에 경주 선비들이 화계서당에 화계사(花溪祠)를 세워 향사를 지냈으나 고종 6년(1869)에 훼철되었다. 1949년에 퇴락한 서당을 수리하여 복향했지만 지속되지 못하였다. 1963년에 화곡저수지 조성으로 화계의 고택과 서당은 모두 수몰되었다. 이로써 화계서당의 천석(泉石)은 다시 찾아 볼 수 없다. 그 후 서당은 저수지 여수로 동편의 강당산 기슭으로 옮겨져 당시의 풍광을 잃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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