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옥산紫玉山 도덕산道德山이 마주보는 골짜기
숲 그늘 깊은 이곳에 각고의 세월이 퍼렇게 서렸고나.
올을 씻어 휑궈 내고 발을 골라 두드려 세운 저 아뜩한 4백여 년,
돌돌돌 물소리로 굴러 내리는 독송讀誦, 초야의 선비정신이 여기에 있다.
준봉같이 근엄한 자태로 철암 같은 육중한 위엄으로 노향老香의 그림자 드리우며 옥산서원玉山書院 주인은 여태도 그렇게 적조히 앉았다.
이따금은 서제의 동창을 밀쳐내며 나무들 잎새 사이로 우러르는 촌벽의 하늘에 당신의 뜻과 이상인 듯 한두 점 유유한 구름의 행적일 뿐, 다시 또 깊은 심상으로 겨워드는 저 끝없는 독락獨樂의 경지여.
읍소재지인 안강安康 서북쪽 7km쯤 되는 자리의 사적 제 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조선이 배출한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유허지, 그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경주慶州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권덕린權德麟등 유림의 후학들이 건립한 강원講院이자 묘우廟宇이기도 하다.
회재가 세상을 뜨고서 20년이 지난 후 선조 5년인 1572년에 선생의 낙향귀환으로 여생을 머물러 살던 여기에다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을 세운 것이다.
이로 하여 산자수명의 안강은 양동良洞민속마을과 더불어 경주慶州의 대표급 조선 문화유적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기면 ‘삐그덕’하고 소리 나는 토담의 빗장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서자 기역자로 꺽어드는 크고 작은 고건물들이 입구자형 배열 방식으로 가지런히 서 있다.
분위기의 고풍스러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거니와 산그늘에 어리어 사뭇 그윽하다.
경내에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한 묘우를 비롯해 구인당求仁堂과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경각經閣 세심문洗心門 등등 20여 채나 되는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우선 먼저 눈앞에 버티어 선 거대한 향나무 한그루, 안아서 두어 아름이나 되는 노태미의 체구에서 거뜬히 수백 년의 수령이 느껴진다.
쭈글쭈글하게 주름 잡힌 목피와 높다랗게 쳐다 뵈는 우람한 풍모, 삭아 문드러지기까지한 백골의 사리뼈 들은 마치도 노학자 회재의 달관된 품성을 대하는 듯 늠름 당당하다.
수형垂形으로 늘어뜨린 나뭇가지, 서늘하게 발산하는 산기운,
저 거대한 거구를 세우고서 선생께서 다시 돌아왔다.
우람하게 직립하고서 문무백관처럼 좌우에 거느린 즐비한 당우로 보아서도 그러하려니와 대원군의 지엄한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의 하나였던 까닭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 명성이란 다 그럴만한 이유에 따라서 얻어지게 마련 아닌가 싶다.
이곳에 보관된 수천 권의 장서 중 유일의 옥산서원 판본인 삼국사기三國史記가 보물 제525호로 지정된 까닭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역락문亦樂門 밖으로는 반석을 치고 도는 물소리가 그득한데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7백여 미터쯤 이르는 곳의 물가에는 독락당獨樂堂의 계정溪亭인 누각 건물이 나타난다.
그 소박한 미관의 멋에 대하여 무어라 구차한 설명을 덧붙이랴.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편히 쉬어 앉아 심신의 무게를 죄다 내려두고 싶어지는, 즉 그대로의 자연친화적인 한국의 전통집이라고나 할까?
필요한 만큼 확보되고 필요 이상인 것은 절제된 한국 표본적 모델 그것이다.
들쭉날쭉한 석벽의 높이 따라 길고 짧은 덤벙주초의 기둥다리를 내려 세우고서 학의 날개인 듯 가볍게 살짝 펼쳐낸 청마루 끝의 난간구조, 이야말로 의인의 이념과 철학이 산천에 응축된 총체적 동양사상의 진수이자 그 엑기스 같은 조경술의 첨단일 것이다.
물아物我의 철저한 혼연일체, 영과 기가 통합하는 그 정신적 성소, 여기 계정의 건축미를 환경적 측면에서 보건데 정적靜寂 그 ‘와비사비’의 무아인 경지로까지 통하는 선善 또는 선禪의 영역 같은 것이기도 하리라.
언제 한번쯤 이런데서 살았으면 싶다.
하지만 독락당의 계정은 누구나 기거할 수 있는 그런 범상의 집은 결코 아닐 터.
여기에 있으면 저절로 도인이 되고 또 저절로 신선이 되어지는 것을.
어쩌면 회재야 말로 정녕 한 시대의 신선으로 살아간 도인道人, 즉 그만이 가능했을 소유의 의식공간이었으리라.
그런 자연성에 따라서 성리학의 문도 크게 열렸으려니 지금도 서원 독송으로 깨쳐 흐르는 저 청량한 물소리의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