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천교에서 보문쪽으로 7번 국도를 지나 올라가면 동천 강둑은 포물선처럼 휘어진다. 포물선의 중심지점에 이르면 강폭은 훨씬 더 넓다. 보문호와 덕동댐이 건설되기 이전, 보문 상류에서 급류를 탄 수세(水勢)는 이곳 완충지대를 거치면서 위력이 한풀 꺾이어 형산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암곡과 황룡계곡의 물이 합쳐져 쏟아지면 동천 제방은 항상 위험했기 때문에 예로부터 경주는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홍수 때 이곳 제방이 무너지면 그 물길은 황룡사지-안압지-계림-향교-오릉쪽으로 향하여, 경주는 마냥 고도(孤島)가 되고 만다고 우려한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달라왕 7년(160)에 알천 물이 범람하여 금성 북문이 무너졌고, 진평왕 11년(589) 홍수 때 도성의 3만 3백여 가구가 매몰되고 2백 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 경상 충청 전라의 삼도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돌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이때 군정은 자기 이름을 돌에 새겨 쌓았는데, 이는 제방 구간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선인들은 동천 제방에 대한 근고(勤苦)함이 얼마나 절실하였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임란 이후 이곳은 수해와 관계없이 주민 계층간의 분쟁 구역으로 변질되었다. 그 경위는 복잡하고 미묘하지만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낭산 서북쪽 들녘은 옛 황용사 터이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늪지대로 남아있었는데, 이를 한지원(閑地原)이라 불렀다. 한치의 땅이 아쉬웠던 주민들은 이를 야금야금 잠식하여 경작지로 바꿔나갔다. 농사를 지으면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동천 제방을 뚫어 물을 끌어와 농업용수로 사용하였고, 농지 면적이 넓어지자 제방을 끊어 물을 대는 상황에 이르렀다. 선조 20년(1587)에 경주 선비 김득지 등이 나라에 글을 올려 제방의 위험이 있으니 경작을 금하고 늪지대로 놔두어야 한다고 하자, 나라에서 ‘엄금(嚴禁)’하도록 하였다. 임란 이후 사정을 더욱 복잡하였다. 울산에서 올라온 난민들이 낭산 북쪽 기슭에 살면서 한지원을 개간하여 경작하였다. 인조 원년(1623)에 이르러 역리(驛吏)들이 한지원이 이권에 적극 개입하였다. 역리란 공문을 전달하고 인적 물적 수송을 전담하는 하급 신분의 아전이다. 이들은 말을 기르고 제반경비의 조달을 위해 역전(驛田)이 필요하였다. 본디 역리들의 거주지는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동편 ‘밝은마을’로, 이를 구사리역(舊沙里驛)으로 불렀다. 이들은 관찰사로부터 한지원의 경작권을 취득한 후 화랑초등학교 부근인 신사리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울산에서 온 난민과 일부 하민(下民)을 규합하여 한지원 개간에 박차를 가하고 동천 제방을 끊어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었다. 곧 경주 동부 일대의 해묵은 늪지대인 한지원은 하민들을 중심으로 논둑을 쌓고 도랑을 파내며 새로운 경작지로 탈바꿈하였다. 황룡사 일대 빈터는 이들에 의해 농지로 변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각 지방마다 유향소(留鄕所)라는 주민 차지기구가 있었다. 향리의 악폐를 규찰하고 풍기를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설치되었다. 이들 구성원은 양반 신분으로 퇴임한 관리 또는 지방 유력자인데, 이를 품관(品官)이라 불렀다. 품관은 역리들이 한지원의 이권을 차지하자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침내 품관이 경주부윤과 단합한 후 역리를 몰아내면서 향쟁(鄕爭)으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세 경주사회의 종횡으로 얽힌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적 또는 신분으로 열세이지만 역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현종 11년(1670)에 역리들은 근 50년 간 경작하던 한지원을 버리고 구사리역으로 쫓겨났지만 굴복하지 아니하고 나라에 글을 올리며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역리들은, 품관이 자신들의 처지를 입언(立言)하려고 `동경잡기`를 편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동경잡기`는 현종 10년(1669)에 부윤 민주면과 고을 선비들이 편찬한 경주 최초의 지리서이다. 이 속에는 역리들의 간교함을 여러 군데 지적한 글이 보이고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품관은 역리들의 이권 개입을 영구히 차단하려 하였다. 숙종 33년(1707) 동천 북안(北岸) 자연석에 알천기적비(閼川記蹟碑)를 세운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품관은 영조 9년(1733)에 지금 경주고등학교 뒤에서 보문호 아래 삼거리까지 약 5리 거리에 산수유나무 등 많은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오리수금호등록(五里藪禁護謄錄)’이란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황오동 등 6개 마을 동민이 책임지고 나무를 수호하고, 동천동 등 4개 동민은 숲지기(藪直) 2명을 차출하여 남벌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몰래 나무를 벤 사람이 발각되면 곤장 80대를 치게 한 절목도 작성하였다. 이는 모두 품관이 역리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글이다. 이를테면 오리수는 동천 제방의 수해 방지를 위해 조성한 것보다 부윤의 비호아래 품관이 만든 숲이었다. 역리와 품관은 한지원의 이권을 두고 근 2백 간 싸움이 지속되었다. 지금은 당시의 축석과 나무도 찾아볼 수 없다. 강둑 남단에 신라 왕경림을 다시 조성하고 있는데, 이곳에 산수유나무를 심어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옛 숲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보문 삼거리 부근을 ‘숲머리’ 마을로 불리고 있다. 숲머리는 ‘오리수의 숲이 시작되는 곳’이란 뜻이다. 조철제(경주고 교사)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