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경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붐볐던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읍성의 남문거리이다. 노동동과 노서동, 동부동과 서부동이 나눠지는 곳이기도 한 남문거리는 법원 사거리가 아니라 그곳에서 봉황로를 따라 남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성문밖 1길과 2길로 나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 도성 숭례문 앞에 시전(市廛) 곧 지금의 남대문 시장이 형성 되었듯이 남문거리 주변에도 포목상 지물포 등 크고 작은 점포가 있었다. 일정 때 경주 중심가인 본정통(本町通)은 지금의 봉황로이다.
남문거리 서쪽 골목을 옹기전골목이라 부르며, 아직도 두 곳의 옹기전이 남아 있다. 성문 안에는 오늘의 시청 경내와 마찬가지로 부윤이 집무하는 동헌을 비롯하여 각종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고, 성문 밖 시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붐볐다. 남문거리의 가장 중심지에 아치형 석조건물 2층 문루가 있었다. 경주읍성 남문의 정식 명칭은 징례문(徵禮門)이다.
도성 남문이 숭례문(崇禮門)이듯, 오상(五常)을 오방(五方)의 배치에 따라 예(禮)는 남쪽을 의미한다. 읍성의 동문은 향일문(向日門), 서문은 망미문(望美門), 북문은 공진문(拱辰門)이다. 읍성은 방어용으로 구축하였지만 고을의 중심지에 위치하였다. 징례문의 문루에 오르면 읍성 전체뿐 아니라 경주 산하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웅장하면서 높았다. 지금 동부동 215-3번지 일월슈퍼와 서부동 255-7번지 태양표구사 자리이다.
1908년에 찍은 징례문의 모습. `고도남루(故都南樓)`이라고 쓴 편액이 보임 ‘고려사’에,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에 처음으로 쌓았고 이후 증축한 기록이 있다. 임란 직전에 부임한 판관 박의장은 경주 지역 장사들의 무예와 담력을 시험하기 위해 징례문을 단숨에 뛰어넘는 경기를 벌였다. 그 높이는 10여 장(丈)이 되었는데 이를 뛰어넘은 사람은 임란 의병장 김득복(金得福, 1561~1626) 등 서너 명에 불과하였다고 ‘동엄실기(東?實紀)’에 적고 있다.
여기에서 임란 이전의 징례문은 장정들이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높지 않았다. 임란 때 성벽이 크게 파손되었던 것을 인조 10년(1632)에 다시 쌓았다. 이 때 숭례문을 새로 축조하였고, 얼마 후 학고(鶴皐) 이암(李?, 1641~1696)이 상량문을 지어 걸었다. 이는 징례문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영조 22년(1746)에 마지막으로 읍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경잡기’에, 읍성은 돌로 쌓았다. 둘레는 4천 75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읍성 안에 우물이 80개 있다고 했다. 특히 징례문은 읍성 문루 가운데 대표성을 지닌 만큼 4대문 가운데 가장 웅대하였다.
1908년에 촬영한 징례문의 사진을 보면 전면에 ‘고도남루(故都南樓)’라고 쓴 큰 편액이 걸려 있었다.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으나 지족당(知足堂) 최석신(崔錫信)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김생 이후 제일 명필이란 평가를 받았던 그는, 경주 관아의 현액 대부분은 그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각헌(覺軒) 이능윤(李能奫, 1824~1876)은 ‘고도남루유감(故都南樓有感)’이란 시 한편을 남기며, 신라의 흥망과 인생의 덧없음을 읊조리고 있다.
앞서 1908년에 찍은 사진은 정조 22년(1798)에 제작한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의 징례문과 꼭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경주읍성은 1912-1932년 사이 대부분 괴멸되었다. 특히 일정 초기의 파괴가 심각하였다. 자동차 사용의 보급에 따라 도로가 신설 또는 확장되면서 그 속도는 더해졌다.
김신재 교수의 ‘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을 보면, 징례문은 1912년에 철거되었다. 그 해 11월에 데라우치 조선 총독이 경주에 내려와 머무르면서 석굴암 등 신라 유적을 두루 관람하였다. 당시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차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총독이 차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 징례문을 철거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읍성의 남북으로 이어주는 도로가 뚫렸고, 1915년에 이르러 성벽을 관통하는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신작로는 차가 다니는 길을 말한다. 1918년 10월 대구에서 불국사역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철로 개설에 많은 석재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읍성의 많은 석재가 여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로써 천년 고도의 상징인 징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도남루(故都南樓)’의 편액은 물론 초석 하나라도 찾을 수 없다. 2009년 봉황로 정비 사업 때 징례문 터에 아무런 석재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를 생각하면 세상은 변해도 어찌 광감(曠感)이 없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