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언제나 새로 열린다. 물의 길, 바람의 길, 사람들의 길 길 위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우리는 한 줄에 꿰어서 역사라고 말한다. 언제부터 였을까? 내 몸에 흐르는 DNA, 핏줄의 연원이 알고 싶다. 그러나 아득할 뿐 멀어진 저편의 세월을 누구도 온전히 읽어내질 못한다. 다만 나름대로 심증을 굳힌다면 경주의 얼과 뿌리가 신라에 내려져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에 기인할 뿐이다. 때문에 오늘의 경주는 홀연히 수유의 잠에서 깨어나 천년왕국 마르지 않는 영광으로 목을 축이며 펄펄 살아 다시 꽃피는 신라의 육화(肉化). 지금 경주는 탱탱하게 물 올랐다. 아직은 4월, 경인년(庚寅年) 봄이 가는데 송화산(松花山) 드나드는 길가에 가로수 벚꽃이 피었다. 절후로는 어제 20일이 곡우(穀雨), 오다말고 그쳐버린 빗물을 머금어서 꽃송이 하나 둘 애잔하게 이울고 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던 조지훈(趙芝薰)의 ‘낙화’가 어쩌면 여기에까지 불여 보낸 절명의 시였던가?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에 밟혀서 아픔의 비명조차도 없이 잠깐에 쓰러져 가는 꽃잎 꽃잎. 분분하게 흩날려 흩어진 저 생명들의 속절없는 아리에타(arietta)여! 오늘은 우리들 영혼까지도 숙명의 그림자 되어 켜켜이 그 속에 함께 스며 번진다. 만리청천 운기우래(萬里靑天 雲起雨來)요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라 구만리의 푸른 하늘에도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듯이 사람 없는 빈산에도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하고 노래한 송나라의 시인, 화가였던 황산곡(黃山谷)의 글에서처럼 꽃피고 물 흐르는 수류화개의 행화촌이 여기에 있다. 충효동 송화산(松花山) 자락마다 살구꽃 만발했던 지난 시절의 꿈, 고향마을 향수가 구름처럼 연기처럼 물씬거린다. 시내의 중앙동에 앉아 내다보는 서쪽방향으로 표고 276m의 옥녀봉, 수도산과 부엉디미를 좌우에 거느린 송화산의 산세를 통틀어서 우리 어릴 적엔 그냥 모두 다 수도산이라고만 불렀다. 명칭의 유래는 일제 때 이후 시내에 수돗물을 공급하던 물탱크와 급수장시설이 있었음 때문이었을게다. 사시장철 동경과 낭만의 무대였던 송화산의 추억, 수도산 일대야 말로 단연 영상으로 밝게 또는 젊은 날 에덴이었다. 봄 여름 가을은 시내의 학생들이 소풍을 다녀가는 곳, 겨울에는 남학생들만의 체력단련장 같이 활용되던 장소, 추위를 이길겸 자주 우루루 몰려서 토끼몰이를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산등성이 전체를 아우러도 그저 소나무 몇그루만이 신목처럼 듬성듬성 서 있었던 세월, 주변은 거의 다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밀림이 된 지금의 현실에서는 어떤 방법으로서도 그 때를 연상해 볼 수가 없게 됐다. 또 한가지, 수도산의 정취라고나 할까, 산이 고요해서 좋았다. 도심을 벗어났다는 심신의 해방감, 그도 그럴 것이 서천강(西川江)을 건너와 있다는 안도감이었으리라. 간혹 눈앞의 대구선(大邱線) 철길로 휙휙 기차가 지나가긴 했어도... 도심과 수도산 지역을 분리하는 천연의 경계선, 서천은 그야말로 그리스 신화에서 듣게 되는 레테(Lethe)의 구실을 해주었다. 고통스런 이승의 삶과 낙원인 저승의 삶을 완전히 끊어 버리는 망각의 물줄기, 서천은 바로 「레테의 강」에 다름아닌 까닭이었은즉. 더군다나 송화산은 눌러앉은 자태가 의연하고 차분하여 가까이 도심에서 보기로도 한눈에 잡히는 요산의 조건을 갖추었다. 애석가로서 일본 제1의 명인으로 추앙된 ‘무라다겐지’(村田圭詞)의 수석론과도 일치하는 산의 자연형세, 선이 부드럽고 흐름이 완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에도시대에 명석 반열에 드는 흑발산(黑髮山) 또는 송산의 끝(松山の 末)과도 흡사한 모양세를 갖추었으니 수도산과 부엉디미는 일반적 시각을 벗어난 그 특성에 차이가 난다. 경주의 성건동에서 자란 한국소설문학의 대부격인 동리(東里)선생의 유년기를 살펴보면 집앞으로 펼쳐진 강변에서 놀기도 했거니와 또 서천강을 건너 송화산에 올라가 해가 저물도록 혼자 쓸쓸히 책과 함께 매일매일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부엉디미 그 자체가 동리의 작품 ‘을화’속에 직접 배경으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송화산의 원래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 김유신 장군의 묘소 부근인 산속에 그의 내자 재매부인이 비구승으로 출가하여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 암자를 세상사람들이 “송화방”이라 불렀다고 하니 아마도 이와 관련된 지명이 아니었을까. 수수수 수도산 수도산에 불났다. 수도산 불끄러 가자. 수수수 수도산 학생 때 몇몇의 우리끼리 지어서 부르던 수도산 불끄기 노래다. 수도산 물탱크에 상반된 막연한 의식적 발상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불끈불끈 힘이 솟는 리듬감각이 압권이다. 그리운 그 시절의 송화산, 지금도 가끔 한번씩 혼자 부르는 노래, 가사를 바꿔서 불러보는 송송송 송화산이 송화산 언저리에 아련히 맴돌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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