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일향일교(一鄕一校)라 하여 고을에 향교 하나씩 두었다. 향교에는 선성을 추향하는 문묘와 유생을 가르치는 학당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따라서 향교마다 원나라 진종이 공자를 높여 왕으로 추봉한 문선왕(文宣王)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 고을에서 향교 이외 공자의 위패는 물론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를 치른 예는 극히 드물지만 경주에는 공자를 모신 두 곳이 있다. 향교에서 석전제를 지내고, 청령리 사상재(泗上齋)에서 공자 영정을 봉안하고 향제를 지낸다. 그렇다면 사상재에서 공자 영정을 모시게 된 배경은 과연 어떠한 경위가 있었을까? 청은(淸隱) 공형표(孔鎣杓, 1868-1933)는 공자의 74세손으로 안강읍 청령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에 공민왕은 원나라 노국공주와 혼인하였다. 이 때 공주를 데리고 고려에 온 사람은 공자의 54세 적손이며 한림학사 공사회 형제이었다. 공사회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갔으나, 그의 아우 공사소(孔思昭)는 귀국하지 않고 고려에 정착하였는데. 이 사람이 한국의 곡부공씨 시조가 되었다. 곡부공씨가 경주에 처음 입향한 사람은 공명덕이고, 앞서 청은은 그의 8대 손자이다. 일제 초기에 이들 공씨는 대동보를 편찬하게 되었다. 청은은 중국 공부를 들어가서 곡부 종파와 한국 족보의 세계(世系)를 대조하고 아울러 공자의 직계 후손도 만나보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종인 공재주와 같이 중국으로 떠났으니 때는 1915년 9월 22일이다. 그는 중국 지도에 어두웠고 특히 곡부를 가려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잘 모르면서 막연히 의욕만 가지고 떠났다. 간단한 행장과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치 이웃 마을 떠나듯 출발했었다. 그는 경주 서악역에서 협궤 열차로 대구에 가서 열차를 갈아타고 서울과 평양을 거쳐 중국 단동으로 들어갔다. 심양을 지나 대련에 이르러 배를 타고 도로 청도로 내려왔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바로 청도에 들어가는 길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돈은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었다. 청도에서 종인(宗人)을 찾아 사정 얘기를 하며 숙식을 제공받기도 했다. 허기와 추위로 얼마나 고생했던지 어느 냉방에서 하루 밤 자고 일어나니 머리털이 모두 하얗고 이가 다 빠진 듯 했다고 회술하였다. 곡부에 도착한 청은은 연성공(衍聖公) 공령이(孔令貽)를 만나려 했다. 연성공이란 송나라 인종이 공자의 적장자에게 봉한 것으로, 공자의 제례를 세습적으로 주관하였다. 공령이는 공자의 76세손이며 2008년 대만에서 타계한 공성덕(孔成德)의 아버지다. 곡부 이화당(履和堂)에서 청은을 만나 전후 사정을 들은 공령이는 크게 감동하여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청은은 갖고 간 족보와 곡부 족보를 대조한 결과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공묘(孔廟)와 공림(孔林) 등 공자의 유적지를 두루 관람하며 참배할 수 있었는데, 이는 모두 공령이의 배려에 의해서다. 당시 중국 정세는 외세 침입으로 매우 불안하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곡부를 떠날 때 공령이는 청은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공자 영정과 공령이가 직접 쓴 ‘문선왕영전(文宣王影殿)’이란 글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같은 선물을 받은 청은은 청도에 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수원에 들러 중인들을 만나고 경주에 도착하니 그 해 11월 17일이었다. 그 후 청은은 경주향교 직원(直員)에 임명되어 근 7년 간 업무를 수행하면서 문묘를 중수하고 관리하였다. 1922년 2월 석전대제를 마친 후 이훤구 등 고을 선비들이 모여 논의하였다. 곧 청은이 곡부에서 갖고 온 공자 진영(眞影)을 후손들이 사사로이 모실 수 없는 일이고, 또 향교에서 첩설(疊設)할 수 없으니 별도로 묘우를 건립하여 봉안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청령리에 영전 3칸을 건립하였다. 당시 일을 주관한 것은 향중 인사들이지만 물력은 모두 후손들이 감당하였다. 매년 공자 탄일인 8월 27일에 석채례를 행하기로 하였고, 영전 아래 재사를 세워 사상재(泗上齋)라 했다. 1924년 4월 영정을 봉안할 때 경주군수 박광열과 최현필 등 많은 선비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영원히 수호하기 위해 모성계(慕聖契)를 조직하였는데, 후손과 원근의 인사들이 다소 돈을 연출하였다. 한편, 청은이 곡부를 찾아간 것은 곡부공씨 선대 세계를 대조하기 위한 뜻도 있었지만 정작 다른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공자 영정을 선물 받고 공령이에 청하여 영전(影殿)의 제호 글씨까지 받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애써 선조이며 유학의 조종(祖宗)인 공자를 별묘(別廟)에서 모시고 싶었다. 곡부공씨가 경주에 들어온 이후 이들은 성전에 출입하는 데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다. 철종 13년(1862)에 공응탁은 자신의 토지 7두락를 교답으로 봉납하고 향교 도유사가 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향의의 일원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영전을 건립하여 향유들로 하여금 향례하게 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문지(門地)를 한층 더 격상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영정이 낡아 개모하는 과정에서 원본을 잃었고, 지금 ‘문선왕영전(文宣王影殿)’의 글씨는 공령이 쓴 것이다. 조철제(경주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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