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제(경주고)
경주에 유명한 기생 홍도(紅桃)가 있었다. 조선 시대 홍도라고 부른 기생은 많았으며, 일제 때 대중가요 ‘홍도야 울지 마라’의 홍도와 무관하다. 경주에서 불국사 방면으로 가다가 동방역을 지나면 통일전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을 조금 지나 왼쪽 농로와 민가 사이 좁은 길을 따라가면 철도 지하도가 나오고, 계속 동쪽으로 오르면 민가 제일 안쪽에 홍도 무덤과 묘비가 있었다. 뒤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가 있었고, 앞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였다. 경주시 도지도 산 627-1번지다. 이 비석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화재가 된 것은 1990년 8월이지만 실제 이보다 훨씬 앞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본디 비석은 두 동강이 난 채 포도밭둑에 누워 있었다. 이를 본 포도밭 주인 이 모씨가 시멘트로 붙여 이었으나 정교하지 못해 약간 구부정하게 이은 비석을 무덤 앞에 세워두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의 모습이며 필자도 이를 몇 번 답사하여 탁본도 했다. 비석 앞면에는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妓紅桃之墓)’라고 썼다. 비의 높이는 120cm, 너비는 50cm, 두께는 20cm, 총 글자 수는 3백 88자이다. 시멘트로 뒤덮인 가운데 부분의 한자는 알 수 없어서 당시 김형진 선생에게 자문하여 빠진 글자를 메워 놓고 국역하였다. 이것이 현재 나돌고 있는 홍도 비문 및 괄호 안의 글자이다.
정조 2년(1778)에 태어난 홍도는, 아버지는 향리 우두머리를 역임한 최명동이고 어머니는 경주에서 대대로 기생노릇을 한 집안이다. 그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계옥(桂玉)이며 자는 초산월(楚山月)이다. 홍도는 재주가 영특하여 옛 글에 밝았을 뿐 아니라 특히 미색이 뛰어났다. 그를 본 경주 부윤이 추천하여 궁궐 상의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독보적인 가무 솜씨를 발휘하자 명성은 서울에 자자하였다. 이를 눈여겨본 정조의 장인이며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이 매우 좋아하여 외부(外婦)로 삼았다. 당시 박준원은 쉰 아홉 살이었고 홍도는 갓 스물 살의 꽃다운 나이었다. 정조는 장인을 위로해 드리려고 별호를 내린 이름이 ‘홍도(紅桃)’이다. 마침내 홍도는 출입이 극히 제한된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근 10년 간 이렇게 보낸 홍도는 얼굴이 야위고 근심이 가득 찼다. 어느 날 박준원이 그 이유를 묻자 홍도는 자신을 앵무새에 비유한 시를 읊었다.
푸르고 붉은 옷을 입은 새가
밤마다 하늘을 보고 울고 있구나.
새장 속에 깊이 갇혀 있으니
어찌 여위지 않겠어요.
홍도는 박준원과 11년 간 같이 살았고, 그가 죽은 뒤 3년 상을 치르고 고향 경주로 내려왔다. 경주에 돌아온 그는 악부(樂府)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곧 경주 교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소리꾼, 기생, 악사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궁중 장악원에서 익히고 닦았던 실력을 후진 양성을 위해 정성은 쏟은 것이다. 당시 경주부의 관기는 약 40여 명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홍도는 상당한 재력이 있었고, 또한 지방 문사들과 더불어 폭 넓은 교류를 맺었다. 특히 그는 시서(詩書)가 능했기 때문에 문인들과 줄곧 어울려 고금을 논하고 시와 술을 즐겼다. 그런데 홍도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후사가 없는 그는, 붓을 들어 그의 모든 재산을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라고 유서를 남긴 뒤 돌아갔다. 때는 순조 22년(1822)이며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선산이 있는 형제산 아래에 묘를 썼다. 재색(才色)을 아울러 갖춘 그였지만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사회적 굴레에 얽매어야 했었다. 묘비명을 지은 최남곤은, 그의 미모는 국내의 제일이고 재주와 시문은 출중하였다고 끝을 맺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철종 2년(1851)에 교방 제자들이 뜻을 모아 묘비를 세웠다.
1990년에 홍도비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 많은 문화인들이 그의 묘소를 찾았다. 기생 무덤은 경주에 유일하고 전국에도 몇 군데 남아 있지 않는 귀중한 유적이다. 그런데 홍도 묘역 일대는 거대한 아파트가 건립하게 되면서 도동구획정리사업으로 지정되었다. 이즈음 홍도 묘에 해괴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곧 묘비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 의해 개발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묘비부터 먼저 없앤 것이다. 홍도묘는 묘비 없는 무덤으로 방치되었다가 2005년 3월에 이르러 무연분묘를 분류되어 공고되었다. 그 해 11월에 홍도 무덤은 무연분묘라 하여 파헤쳐 화장한 뒤 영호공원납골당에 합동으로 안치시켜 버렸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다. 최소한 양심마저 잃은 만행이었고, 경주시의 행정력도 실종하고 말았다. 홍도 무덤은 경주의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홍도비는 꼭 찾아야 한다. 어딘가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고 행방도 묘연하다. 형제산과 문천 가에 떠도는 홍도의 고혼(孤魂)을 잔 잡고 권할 데 없어서 더욱 아쉽다.
홍도 무덤이 있었던 곳
묘비 앞면의 쓰인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妓紅桃之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