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착한 사람이 죽어 저 세상으로 갔다. 그 사람도 예외 없이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는데 염라대왕이 그만 오심(誤審)을 하여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지옥에서는 이 사람을 위해 성대한 환영만찬을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음식도 푸짐했다.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음식을 먹지 못했다. 식탁에 놓인 젓가락이 1미터나 되는 긴 것이어서 도저히 음식을 집어 입에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착한 사람은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이 오심을 정정(訂正)해 주었기 때문이다. 극락에서도 성대한 환영잔치가 열리고 지옥에서와 마찬가지로 푸짐하게 음식이 나오고 긴 젓가락이 놓여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극락 사람들은 지옥 사람들과는 달리 음식을 잘 먹는 것이었다. 그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는 것이 아니라 앞에 앉은 사람이 집어 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었다. 착한 사람은 극락과 지옥의 차이가 어떻게 다른가를 깨달았다.
이 세상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어느 누구도 단독자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너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나는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윤택해지기도 하고 피곤해 지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가 언제나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개인과 개인, 노(勞)와 사(使), 여(與)와 야(野),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이해가 엇갈리고 대립과 갈등이 수없이 반복된다. 서로간의 관계가 고른 화음을 내지 못하는 것은 관계속의 인간이죖관계의 원리’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관계의 원리란 한마디로죖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나와 남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서로 다른 존재끼리 사는 곳이기 때문에 한 존재가 무엇을 독점하면 반드시 다른 존재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남도 인정해야 한다. 이 평범한 관계의 원리를 무시하고 나만 잘 먹고 나만 잘 살려고 하면 종국에는 나도 못살고 남도 못살게 된다. 나 혼자 고대광실(高臺廣室)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회가 혼탁하고 각종 범죄가 들끓으면 나만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표방하고 있는 경전의 하나인『유마경』에서는 보살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경의 주인공은 유마힐, 그는 승려가 아닌 재가불자이다. 그는 매우 지혜 있는 인물로서 집안은 부유하고 처자도 있는 몸이다. 그는 장사도 하고 권력자들과 접촉도 하며 술집에도 가고, 도박도 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끌려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유마힐이 무슨 까닭인지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그의 병문안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두 사람의 대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당신의 병은 어찌해 생겼고 병 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당신의 병이 나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수보살의 질문에 유마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 병은 무명으로부터 애착이 일어나서 생겼으며, 또한 모든 중생이 병을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생사(生死)에 들고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보살도 병을 앓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의 병은 바로 이와 같이 자비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유마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병은 중생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즉 중생(이웃)이 아프니까 자기가 아프다는 것이다. 중생의 병이 나아야만 자신의 병도 낫는다는 유마힐의 말씀 속에서 보살행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보살은 왜 이웃과 고락을 함께 하는가? 그것은 이웃과 나는 본질적으로 하나(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웃과 내가 어떻게 하나인가? 불교사상의 핵심인 연기설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느 것 하나 고립 독존하는 것이 없고 연기(緣起)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A와 B가 존재한다고 할 때, A도 B도 고립,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B와의 관계에서 A가 생기고 A가 있으므로 B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곧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며, 너를 위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 중생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이며 이러한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 보살인 것이다. 모름지기 모든 사람들이 보살로서 동체대비사상을 몸소 실천할 때 이 세상은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