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독관(提督官) 손기양(孫起陽)이 경주 향교에 온 것은 신축년(1601) 여름 때이다. 제독관이란 종래 향교 교육을 담당했던 교수나 훈도와 달리 8도에 각 한 명씩 파견된 사람이다. 이들은 공교육, 즉 향교 교육을 진흥시키고 교생들의 학문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려왔다. 손기양은 경주에 와서 교생들이 지켜야 할 학령(學令)을 발표하여 임란 이후 흐트러진 교육제도를 중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교생들과 공부하다가 여가가 있으면 남산에 가서 소나무를 캐어 그것을 향교 외삼문 밖과 명륜당 뒤뜰에 심어두고 잘 보호하도록 했다. 어린 소나무를 이식했지만 해가 갈수록 향교 전후에는 작은 숲을 이뤄 함취(含翠)의 정을 더해주었다. 이후 50여 년이 지난 을미년(1655)에 안강 하곡에 사는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 1577-1658)가 이를 보고 󰡐송단기(松壇記)󰡑를 지었다. 옛날 공자 고향 궐리(闕里)의 강단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는 언제 말라죽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행단(杏壇)의 터만 전할뿐이었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가 말라죽는 것은 사람들의 애호와 무관하지 않다. 또 궐리에는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전나무(檜) 세 그루가 있었다. 이 나무는 진(秦)․한(漢) 시대에 무성했다가 진(晉)나라 때 말라죽었고 수나라 때 다시 살다가 당나라 때 다시 고사했다. 그 후 송나라 때 소생했다가 여진족이 남침하여 화가 이 나무에 미치자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사람들은 이 나무를 베어 공자와 제현(諸賢)의 초상을 조각하여 묘우에 봉안했다. 이는 나무의 생사가 사람과 시운에 관련이 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명륜당 뒤뜰의 소나무 역시 이러한 나무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향교 교육이 진흥하는가의 여부는 이 소나무의 성쇠와 유관하다는 말이다. 송단의 소나무가 무성히 자라면 유학이 크게 융성할 것이고, 반대로 소나무가 잘리거나 말라죽으면 사도(斯道)가 영쇄할 것이라고 정극후는 기술했다. 또한 재임기사록(齋任記事錄)을 보면, 병진년(1856)에 송단의 큰 소나무 열여덟 그루가 담장 높이 솟아 있었다. 어느 때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는 우리나라 승무(陞?) 18현을 상징해서 심은 것으로, 그 보호와 애착은 각별했다. 이 해 봄에 한 그루가 바람에 넘어지자 그 자리에 어린 소나무 수백 그루를 심고, 향교 노비로 하여금 수호하게 했다. 이같은 의미에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 명륜당 뒤뜰 송단은 비보림(裨補林) 이외 향교 교육의 흥체(興替)와 아울러 승무 18현을 의미하고 보호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향교 뒤뜰 담장 안에는 어린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지만 이를 두고 송단이라 하지 않는다. 송단은 뒤뜰과 뒷담 넘어 송림(松林) 전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곳 송림은 내물왕릉의 도래 솔(松楸)처럼 보인다. 지금은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본래 향교 후원의 영역이다. 만약 내물왕릉의 도래솔이었다면 왕릉 앞보다 북편에 심었을 것이다. 따라서 송단은 현재 내물왕릉 앞 소나무 단지의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이는 무오년(1798)에 만들어진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의 그림에서도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향교 북편은 작은 구릉으로 이뤄져 있고, 그곳에 소나무 20여 그루가 숲을 이루며 향교 북편의 허한 부분을 돕고 있다. 이들 송림은 지금 내물왕릉 앞의 소나무로, 향교의 송단 구획으로 나타내고 있다. 송단 북편에 다시 V 자 형으로 심어진 소나무가 왕릉의 도래솔로 보이지만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왕릉과 향교의 송림은 뚜렷하게 구별돼 있다. 내물왕릉 주변에 차츰 민가가 들어서면서 송림은 거의 없어져버렸고, 향교 송단이 그것으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이름마저 향교송단이란 말 대신 내물왕릉 솔숲으로 부르게 됐다. 뿐만 아니라 향교 동쪽 대문 밖 철책 넘어 향교에 따른 연못이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매몰돼 저습지대로 변한 채 계림에 편입됐다. 지금 향교 뒤뜰 안의 좁은 둔덕에 작은 소나무 몇 그루를 심어두고 이를 송단이라 부른다. 남아있는 한 두 그루 고송(古松)은 가지마저 모두 꺾이거나 부러져 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송단의 원형은 거의 사라졌다. 이곳의 솔숲을 잘 보호하게 했던 선인들의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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