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술조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화가로서는 유일한 출세의 길이기도한 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하고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 동미전(東美展), 목일회(牧日會) 등의 그룹을 통해 활동했으며, 이들은 조선미술전람회의 보수적인 경향에 반기를 들고 표현주의, 야수주의, 추상미술 등 여러 경향을 다양하게 시도하며 한국 현대미술사조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이 당시의 창립회원들은 후에 거의가 대학에서 후진을 가르치거나 순수작가로 활약했는데 주 멤버로는 이종우, 구본웅, 김용준, 이병규, 길진섭, 송병돈, 김환기, 황술조였으며 모두가 정통아카데미를 거친 엘리트로서 1930년 이래 한국 신미술운동의 주도자들이며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화가들이었다.
황술조는 일찍 타계한 관계로 불과 10년 정도의 짧은 작가 생활속에서 그의 작품도 접해보기가 매우 힘들다. 1974년 고향 경주의 황오동 형집에서 70여점의 유작을 발견하게 된 것이 거의 전부다.
물론 이 유작 가운데는 스케치나 수채화, 석고소묘 등 유학시절에 습작한 작품들이 섞여 있었으며, 본격적인 유화작품은 전부 타지로 유출되어 막상 고향에서는 한점도 감상할 수 없는 애석함이 있기도 하다.
황술조가 한창 서울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1930년대의 서양화단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해 “대담한 필치와 무거운 중량감의 표현이 양화계를 대표할 만하다”고 한것으로 보아 안이한 작품의 화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동미전에 출품한 ‘연돌 소제부’에 대해는 `생활의 고통과 저항정신의 표현’이라고 지적하여 현실생활의 반영이 잘 드러난 인간적인 모습의 작품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황술조는 예향 경주가 자랑할 만한 한국 근대미술의 선두주자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동경유학을 마치고 서양화를 유입한 춘곡(春谷) 고희동보다 불과 10여년 후에 경주로 서양화를 들여온 화가로서 이후에 손일봉, 손동진 등이 그 뒤를 이어 경주의 신미술계를 형성한다.
작품 `실내`는 평범한 가정의 서민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소재이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갈색과 황토색이 주로 이루어진 소박한 풍경이다. 거칠고 큰 텃치가 무게를 더하는 듯 하며, 아무렇게나 놓여진 그릇이나 기물이 오히려 인간적인 서민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의도적이지 않은 구도가운데 왼쪽 위에서 아래로 늘어진 커텐과 오른쪽 아래의 검은 물체가 대조적으로 파격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