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2리(新院二里)
새로 원이 들어서 ‘새원’ → ‘신원(新院)’
김유신 장군 무술 수련하던 장육산
신원은 경주의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의 경계지점에 있다. 경주에서 건천과 산내를 거쳐 청도로 가는 국도 20호선을 따라 외칠리를 지나면 장육산과 어실산 사이에 넓은 들을 끼고 있는 이 마을에 이른다.
장육산(장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마을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배경으로 넓은 들(신원들)과 거랑(동창천)을 끼고 있어 살기 좋은 마을이다.
신원은 서쪽으로 운문댐을 사이에 두고 청도군 운문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일부리, 동쪽은 외칠리, 북쪽은 내칠리와 이웃하고 있다.
60세 이하 3명뿐 농사짓기도 어려워
이 마을은 새로 지은 원(院)이 있어 ‘새원’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어 1914년 행정구역 통 ․ 폐합 때 ‘신원(新院)’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원1리의 경우 본래 ‘옻밭’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큰 옻밭이 있어 ‘옻밭’이라고 불렀으며 그 안쪽에는 ‘안옻밭’이라 하여 지금의 내칠리이고, 그 밖은 ‘밖옻밭’이라고 하여 지금의 외칠리이다. 옻밭을 중심으로 3개 마을의 이름이 유래할 정도였으니 그 옻밭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 ․ 폐합으로 내칠 ․ 외칠리 모두 옻칠(漆)자 대신 일곱칠(七)자를 쓰고 있어 그 본래의 뜻이 왜곡되어 안타깝다. 꼭 바로잡아야할 마을이름이다.
‘옻밭’ ․ ‘덕마을’ ․ ‘박다’가 신원 1리, ‘새원’ ․ ‘굴미’ ․ ‘맷골’이 신원2리를 이루고 있다. 경주시청에서 33km 약 50분 거리에 있다.
신원2리는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밭작물은 고추, 포도, 사과, 복숭아, 대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고추는 4ha, 포도 8ha, 사과 16h, 복숭아 4ha, 대추 2ha 등이다, 축산은 한우를 100여두 기른다.
현재 61가구에서 남자 41명, 여자 56명 등 총 9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농사철에만 와서 사는 유동인구가 10여명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96살의 김차향(보동댁) 할머니로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해 12월 노인요양병원에 입원중이다.
각성바지라 단합 잘 돼
신원(新院) 이곳에 새로 지은 원(院)이 있어 ‘새원’ 또는 ‘신원(新院)’이라 했다고도 한다. (37가구)
동제 이 마을은 매년 정월보름날 동제를 지냈으나 70여년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당나무 마을회관 옆에 있는 포구나무로 수령이 200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굴미 이곳에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선비들이 많이 모였다고 ‘글메’, ‘글미’라고 하던 게 변해 ‘굴미’라 했다고 한다. ‘문산(文山)’이라도 한다. 맷골 동남쪽에 있다. (7가구)
맷골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에 매화가 많았다고 하여 ‘매골’, ‘매곡(梅谷)’ 혹은 ‘매일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매골은 ‘안매골’, ‘바깥매골’, ‘작은매골’ 등으로 나눈다. 본래는 골짜기 안에 ‘안매골’과 ‘작은매골’에 살다가 지금은 바깥으로 많이 이주해 ‘바깥매골’에 많이 산다. (17가구)
안맷골 맷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폐촌이 되었다가 최근 새로 8가구 들어섰는데 3가구는 살고, 나머지는 주말에 이용한다.
작은맷골 맷골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에 있던 마을인데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당목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수백년된 느티나무이다. 동제는 지내지 않는다.
가시 있는 식물은 없어
장육산(將六山 685m) 신라 때 6명의 장군이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여 ‘장육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산모양이 마치 장구처럼 생겨 ‘장구산’이라고도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신라 김유신 장군이 여기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며 특히 이 산에서는 찔레나무 등 가시가 있는 식물은 없는데 김유신 장군이 가시의 뿌리를 다 캐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실산 신원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이 산 동쪽기슭에 ‘굴미’, 북쪽기슭에 ‘매골’이 있다.
굴바우 장육산에 있는 바위로 20여명이 들어갈 정도의 굴이 있다. 이곳에서 장군수(將軍水)가 나왔다고 하며, 조용한 날에는 바위 속에서 표주박과 바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전쟁 때 피신하였던 곳이라 ‘감사바우’라고도 한다. 이 바위에도 공을 많이 드린다고 한다.
이곳에는 장군이 투구를 쓰고 앉아있는 모양이 새겨진 바위(탱바우)가 있다.
마당바위 장육산 정상부 굴바위 동쪽 100m 위쪽에 마당처럼 넓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어른발자국과 아이발자국이 많이 찍혀있다고 한다.
투구 쓴 장군 상 새겨진 바위
탱바우 장육산 굴바위에 장군이 투구를 쓰고 앉아있는 모양이 새겨진 바위를 ‘탱바우’라고 한다.
일산바우 신원 동쪽의 큰골 동쪽 장육산 남녘에 있는 큰 바위다. 도로에서 보인다.
무제터 장육산 마당바위 위쪽에 있는 기우제를 지내던 터다. 산내면민들이 가뭄에 여기서 무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 올라가서 제 지내고 음복을 하기도 전에 비가 왔다고 한다.
절터구미 어실산 동쪽에 옛날 절이 있었다고 곳이다. 신원 남쪽에 있다.
생금빌 신원 서쪽에 장육산 남녘에 병풍처럼 바위가 둘러쳐져있는 곳을 ‘생금빌’이라고 한다.
다락골 신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분지골 신원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원골 신원 북쪽에 원집이 있던 뒤 골짜기다.
큰골 신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름처럼 크지 않고 작은 골짜기다.
안맷골 맷골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다.
작은맷골 매골 서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남편 따라 죽은 열녀 서씨
열녀각(烈女閣)터 정씨집안 열녀 서씨(徐氏)의 정문이 있던 곳으로 오래 되어 30여년전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서씨는 남편이 죽자 따라 죽어 열녀각을 세웠는데 그 후로 집안이 멸문했다고 한다.
원집터 신원의 동북쪽에 옛날 원집이 있었던 터다. 지금은 소 집이 들어서 있다.
신원들 신원 남쪽에 있는 들로 본래 ‘덧말들’, ‘큰들’, ‘종진개’, ‘중들’, ‘건넷들’, ‘새들’, ‘원앞’, ‘넙들’, ‘샘배기’ 등 9개 들이 있었는데 1993년경 경지정리하면서 ‘신원들’ 하나로 통합되었다.
큰들 신원 동쪽에 있는 큰 들로 지금은 경지정리로 신원들로 통합되었다.
중보(中洑) 신원 동쪽의 큰들 남쪽에 있다.
큰들보 옛날 큰들에 있던 보로 신원 동쪽 신원들 가운데 있다.
덧말들보 신원 동쪽 옛 덧말들에 있던 보로 큰들 북쪽에 있다.
시내버스 운행횟수 늘려주었으면
이 마을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옛날부터 인물도 많고 산내에서 운동회를 하면 우승도 많이 하고 했다. 각성바지라 단합이 잘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14문중이 살다가 지금은 8문중이 산다. 그러나 지금은 쇠락하고 노령화되어 마을에서 60세 이하는 3명뿐이며 앞으로 농사짓기도 어렵다고 한다.
이 마을주민들은 교통불편을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고 했다. 시내버스가 하루에 2번 오는데 이를 4번으로 늘려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산내까지 오는 차가 잠깐 올라왔다 가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가뭄 때문에 물이 부족해 양수장을 더 설치했으면 한다. 동창천이 하구로 본래 물이 풍부했으나 최근 대현댐이 생기고 상부에서 물을 많이 퍼가니까 하구쪽인 신원은 가물때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 현재 양수장 3개가 있는데 1개 더 설치했으면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시호(81 예비역 육군대령), 문석호(77 전 산내면장), 박용성(69 전 경주군의원), 석희진(62 농수산부 축산과 부이사관), 진병무(61 예비역 육군대령), 석도균(59 포항 상대동 총무담당), 주상호(55 대구서구청 세정과장), 이재열(55 포항시청 전략사업본부 동빈내항복원팀장), 이규일(49 경상북도)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000이장과 000노인회장을 비롯한 마을주민여러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