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수(土水) 황술조는 경주예술사에서 조차 잊혀져가는 경주 최초의 일본유학 출신의 화가이며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기에 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한국화단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이기도 하다.
토수는 1904년 경주 황오동의 대지주였으며 한의였던 황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계림보통학교(지금의 계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양정고보를 나와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6세 때인 1930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에서 교편을 잡다가 서울에 잠시 머무른 후 32세 때 경주로 낙향했다.
경주에서 그는 경주고적보존회(현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의 상임고문역을 맡으면서 신라문화와 고미술품에도 심취해 풍류와 예술문화의 생활을 즐기기도 했으나 부유한 가문에서 풍요로운 생활은 자연히 과음과 무절제한 일상으로 이어졌으며 끝내 신병으로 요양원 생활을 하다가 36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떠난 1939년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로 어느 누구도 미술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시대였으며 특히 작은 시골마을의 문화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1970년대 말 경제적인 부흥이 도래되고 세상은 미술과 문화 쪽에 눈을 돌리게 돼서야 황술조라는 화가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서울의 재벌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뒤늦게 한국 근대 미술사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황술조가 부호가문 출신이라는 환경적 요인이 후에 그의 예술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어려서부터 삶의 역경을 만날 기회도 없이 항상 풍족한 생활속에서 인생을 즐기는 선택받은 행운아였던 그는 자신이 누리는 풍요와 여유가 예술세계를 이루는 정신적 바탕에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말하자면 고난의 예술가적 소명이나 창작의 기능적 실험 같은 작가의 고뇌 등과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궁핍으로 치달은 암흑기에 부유한 생활과 자유로운 삶은 예술가로서의 절박한 현실이나 시대적 저항감으로부터 한발 뒤로 물러선 안일의 표현의식이 그의 그림세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