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리(有琴里)
용이 승천하게 한 유금이 따서 ‘유금(有琴)’
정구지 460톤 생산 전량 서울 판매
52년 만에 가장 둥글다는 대보름날 화왕산 억새 태우기 축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길에 휩싸여 죽거나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우리가 자연을 너무 경솔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유금(有琴)은 강동면 지역으로 포항시와의 경계지점인 형산강 하구의 형산목 북쪽 제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경주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포항으로 가다가 강동대교를 지나 강동면사무소 북쪽 벽산아파트에서부터 유강터널 입구까지가 유금에 해당한다. 위덕대학교와 벽산아파트, 삼성아파트, 부조역, 강동초등학교 등이 이곳에 있다. 경주시청에서 20km, 25분 거리이다.
이 마을이 ‘유금’으로 불린 데에는 김부대왕 전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옛날에는 형제산이 이어져있었고 형산강이 동해로 흐르지 못했다. 이 일대는 큰 호수였으며 안강까지 물에 잠겨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경순왕은 태자 김충과 의논해 백일기도를 통해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으로 삼층집을 지어 옥황상제와 천지신명에게 나라의 안녕을 빌고, 태자는 용이 되어 형제산을 끊기로 약속했다.
“할머니 저건 용이야”
태자는 기도로 큰 뱀이 되었으나 누가 그를 용이라고 불러 줘야 완전한 용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용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렸지만 큰 뱀을 보고 달아나기만 할뿐 아무도 그를 용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백일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아 낙심하고 있을 때였다. 이 마을 유금이가 할머니 등에 업혀 지나다가 큰 뱀을 보았다. 할머니가 깜짝 놀라 “저런 큰 뱀도 있는가?” 했다. 그 때 유금이가 말하기를 “할머니, 저건 용이야” 했다.
그러자 뱀은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며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 그 맥을 잘랐다. 호수에 고였던 물이 동해로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큰 들판이 생겼다. 그 후 이 일대를 ‘유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유금은 6개리로 구획되어 있다. 1리~4리까지는 자연부락으로 농가들이 대부분이고, 5리와 6는 아파트단지로 대부분 직장인들이 살고 있는 도농복합형 마을형태를 띠고 있다.
유금1리는 ‘유금’, 유금2리는 ‘공정골’·‘내동’, 유금3리는 ‘광암’·‘덕남’, 유금4리는 ‘장테’, 유금5리는 벽산아파트, 유금6리는 삼성아파트로 각각 구획하고 있다.
일터 포항인 아파트주민
1리는 유금마을로 제산 서편기슭에 있다. 총 120가구 250여명으로 거의 대부분이 농가이다. 이 마을은 벼농사 외에 정구지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17가구에서 17ha를 경작하고 있고 연간 460톤을 생산하여 전량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으로 판매하고 있다.
2리는 위덕대 후문(남쪽)에 자리한 ‘공정골’, ‘안골’이다. 이 마을은 벼농사 외에 복숭아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3만여평에서 연간 2억원의 수익을 올린다. 한우는 1가구에서 40마리를 기르고 있다. 현재 60가구에서 1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3리는 ‘덕남’, ‘광암’으로 구 역전에 있다. 현재 85가구에서 170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4리는 ‘장테’로 덕남 남쪽에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현재 70가구에서 1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5리 본래 4리 장테와 한 마을인데 10여년 전에 벽산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분구되었다. 360가구 1000명으로 대부분 직장인이다.
6리 본래 1리 구역으로 위덕대 앞(동쪽 정문)에 있는 마을이다. 1999년 삼성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 997가구 2800명으로 거의가 포항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손기호(93 남뱅이어른) 할아버지로 매일 경주에 출입할 정도로 아주 건강하다. 이 날도 경주로 출타하고 집에 안 계셔서 만나지 못했다.
용으로 화해 형제산 절단
유금(有琴) 옛날 김부대왕이 이 마을에 사는 ‘유금’이라는 아이가 용이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에 용으로 화해 형제산을 절단했다는 전설에 의해 마을 이름을 ‘유금’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과 형제산이 어우러진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인근의 선비들이 모여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곳이라 하여 ‘유금’이라 했다고도 한다. 아산장씨 집성촌으로 현재 14가구 남아 있다.
동제 이 마을은 1970년대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당나무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당나무로 있었는데, 누가 밤에 기계톱으로 베어갔다고 한다.
강정(江亭) 형산강 가에 있던 마을로 옛날 이곳에 만귀정(萬歸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형산강의 강(江)자와 정자의 정(亭)자를 따서 ‘강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웃마을 유금과 한 마을로 그 위쪽을 말한다. 옛날에 이곳에 창을 많이 묻었다고 하여 ‘창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음씨 곱고 정직한 사람 많아
공정골 신라 때부터 마음씨 곱고 정직한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공정(公政)’, ‘공정리’, ‘공정동’이라고도 한다. 광암 동북쪽에 있다. 경주손씨 집성촌으로 현재 20가구가 산다. (30가구)
안골 마을이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하여 ‘안골’ 또는 ‘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계댐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그곳에 못이 있어 ‘못밑마을’, ‘제하(堤下)’라고도 한다. 공정골 서북쪽의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다. (30가구)
동제 이 마을도 1970년대까지 동제를 지냈으나 제관선정 등 절차가 어려워서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당나무 소나무로 수령이 200년 정도 된다. 마을회관 남쪽에 있다.
광암(廣岩) 마을 앞에 넓은 바위가 있어 ‘너븐바우’, ‘광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덕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한 평 남짓한 넓은 바위가 지금도 논 가운데에 있다. 창녕조씨 집성촌으로 덕남을 포함해서 17가구이다. (35가구)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냈으나 2년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당나무 마을 가운데 있는 수령 200년의 느티나무로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을 얻었다고 ‘득남’
덕남(德南) 마을이 남향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득남(得南)’이라 부르다가, 뒤에 ‘덕남(德南)’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다른 이야기는 마을 뒷산인 덕맹산(德孟山)이 남으로 행해 있다고 하여 ‘덕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월성손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3집만 남았다. 장테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50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제를 지낸다.
당나무 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 400년 된 포구나무이다.
샛골 덕남과 광암 사이에 있는 마을로 사실상 덕남과 한 마을이다.
장테 이 마을은 본래 해마다 홍수로 모래둑이 생기므로 ‘새두들’, ‘두둑’이라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면사무소와 부조장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장터’, ‘장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장이 서지 않는다. 인동리와 거의 한 마을을 이루며 강동면 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음지마을 부조역 뒤에 음지쪽에 있는 마을로 ‘음지말’이라고도 한다. 지금 5가구가 살고 있으며 4리에 속한다.
영남 성리학의 태두
동강서원(東江書院) 성종 때의 청백리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을 제향하는 곳이다. 본래 조선 숙종 33년(1707)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나 고종 5년(1868) 금령으로 헐렸던 것을 1956년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웠다. 최근(3~4년 전)에 신도비와 비각, 누각을 새로 세웠으며 기와도 새로 이었다.
우재선생은 경주손씨로 양동마을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이조판서를 비롯한 3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영남 성리학의 태두로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공은 조선 대학자 회제선생의 외삼촌이다. 유금리 제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만귀정(萬歸亭)
조선 효종 원년인 1650년에 장유량(蔣惟亮)이 형산강 가에 세웠다는 정자로 1643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된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 1577∼1658)의 기문(記文)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오래전에 허물어지고 그 터만 남았던 것을 유강터널 공사로 인해 건물터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해 확인된 유구는 샛골 뒷산인 유금리 산 34번지에 이전하고, 정자는 10여년전 유금마을회관 옆에 새로 지었다.
광암재(廣巖齎)
1600년경 아산인(牙山人) 광암(廣巖) 장계현(蔣啓賢)이 세운 재실로 1986년 후손들이 중건했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곽재우, 최응수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각종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에 제수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쪽에 방, 앞쪽에 마루를 배치했다. 광암에 있다.
연천정(淵泉亭) 장윤석(蔣允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그가 수학하고 강학하던 곳에 1981년 후손들이 유금에 세운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사방을 유리로 덧집을 지어 놓았다. 웃마을에 있다.
추모재(追慕在) 동은(東隱) 조우주(曺佑周), 사직(司直) 조하일(曺夏一), 뇌소재 조의준(曺義俊) 등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광암에 세운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양쪽에 방, 가운데 마루를 배치했다.
보부상을 위한 유공비
유곡정(柳谷亭)
경주인 유곡(柳谷) 손계돈(孫季暾)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66년에 공정동에 지은 정자이다. 유곡공은 양민공 손소의 넷째아들로 우제 선생의 동생이다. 5칸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어은정(漁隱亭)
경주인 어은(漁隱) 손윤돈(孫潤暾)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75년에 공정동에 지은 정자이다. 어은공은 양민공 손소의 다섯째아들로 우제 선생의 막내 동생이다. 4칸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보부상 유공비
조선 고종 원년(1864)에 세운 비로 높이 80cm, 너비 25cm, 두께 10cm로 ‘좌상대도접장 김공이형 유공비(在商隊都接 長金公以亨 有功碑)’라 새겨져 있다. 당시 보부상은 서울에 도수령, 각 도에는 도반수, 접장 등을 둔 전국적인 사업조직이었다.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제산기슭에 있다.
형과 떨어진 아우의 산
제산(弟山) 강동면 유금리와 포항시 유강의 경계에 있는 높이 205m의 산으로 그 맥이 도음산(禱陰山)에서 내려왔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형산(兄山)과 마주하기 때문에 형제봉산(兄弟峰山)이라고 불린다. 이 산의 서남쪽기슭에 동강서원이 있다. 최근 이 산을 뚫어 유강터널을 설치했다.
갓골산 덕남 서쪽의 갓골 위쪽에 있는 산이다.
덕맹산(德孟山) 덕남 뒤쪽에 있는 산이다.
매봉재 안골의 동북쪽에 있는 높이 236m의 산으로 마치 매가 나는 형국이라고 한다. 6.25때 인민군이 점령해서 관제했던 곳이라고 한다.
등명이재 공정골 동북쪽에서 포항시 남구 연일읍 자명리의 등명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등맹이재’라고도 한다.
불팃고개 공정골 동북쪽에서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부리팃고개’, ‘불티’, ‘부리티’ 또는 ‘화현(火峴)’이라고도 한다.
장고개 유금 덕남에서 인동을 거쳐 안강장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갓골 덕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말림갓이 있었다.
갓닷골 갓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덕남 남쪽에 있다.
부리팃골 불팃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로 ‘화현곡(火峴谷)’이라고도 한다. 위덕대 북쪽에 있다.
불미골 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범이 많아 ‘범의골’이 ‘불미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당골 광암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약 200년 전 이곳에 조의준(曺義俊)이란 선비가 세운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수릿골 공정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용춧골 웃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폭포가 있다.
재궁골 공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손씨 재실이 있다.
절골 갓닷골 서남쪽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 부조역 서쪽 골짜기다.
질밑골 인동리 장고개 길 밑에 있는 골짜기로 강동면사무소 북쪽에 있다.
큰골 매봉재 밑에 큰 골짜기로 위덕대 서쪽에 있다. 골이 깊어 ‘아흔아홉골’이라고도 한다.
한 평 남짓한 너븐바위
너븐바우 광암마을 앞 밭에 있는 바위로 가로세로 각각 2m 정도 된다. 이 바위로 인해 마을 이름이 광암이 되었다.
남가리들 유금 앞들로 지금은 정구지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다. ‘유금들’이라고도 한다.
갈밭들 삼성아파트 앞에 있는 들로 옛날에 갈대밭이었다.
마댓들 공정골 앞쪽에 있는 들인데 철길 안쪽은 ‘안마대’, 철길 바깥은 ‘바깥마대’라고 한다.
웅굴넘들 광암 북쪽 큰 웅굴(우물) 너머에 있는 들이다. 내동에서는 이를 ‘안들’이라고 한다.
유금저수지(有琴貯水池) 유금 북쪽에 있는 못으로 ‘유금못’이라고 한다. 해방 전에 막다가 완공은 해방 후에 했다. 불티골밑에 있어 ‘불티못’이라고도 한다.
용추(龍湫) 용춧골에 있는 폭포로 용이 등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원석심인당(心印堂) 대한불교 진각종 교화장으로 공정동 마을 뒤에 있다. `공정골심인당`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있다.
위덕대학교(威德大學校) 1996년 3월 대한불교 진각종에서 설립한 학교다. 인문·사범·사회·자연·공학·예체능 등 6개 계열 22개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유금리 525번지에 있다.
형산목이 강폭 확장해야
질 좋은 정구지를 생산하는 유금은 본래 대문 없는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치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 도둑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은 침수피해를 호소했다. 형산강하구의 형산목이 좁아 물 빠짐이 좋지 않아 침수피해가 잦다고 한다. 형산목의 강폭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곳의 물빠짐이 원활하지 않아 안강까지 침수피해를 입는다.
동해남부선의 일반철로가 이설되면 포항제철에서 나원으로 가는 화물기차의 철로를 산업도로처럼 포항-나원 간에 직선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선로를 개설하고 철도만큼 강폭을 확장하면 된다고 그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렇게 하면 강동은 물론 안강까지도 침수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장윤환(80 지질학박사), 김봉규(76 전 중소기업은행 부행장), 손주익(68 보훈처 보훈심사위원), 오수남(67 전 중소기업은행 대구 북지점장), 손영익(64 전 새마을지도자 경주시 협의회장), 박동호(63 예비역 육군 대령), 손오익(63 전 경주시 기획문화국장), 김용태(58 전 농협중앙회 경주지부장), 안진수(57 전 경주시의원), 김덕수(57 한-스리랑카 불교복지협회 회장), 강인준(56 보건복지부), 장철모(55 예비역 육군 중령), 조희대(54 서울고법 부장판사), 장기목(52 하나은행 구미지점장), 김영태(47 육군 중령), 윤수왕(44 대구은행 포항 이동지점장), 김동진(41 부산고법 판사), 곽정환(41 변호사), 이익수(41 포항1대학 교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