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진이 파리유학시절 4년 동안 매해 큼직한 국제미술전에 참가하면서 그는 파리화단에서 촉망되는 현대화가로 지목했다. 1959년, 파리에서의 성공적인 작품들을 만재해 귀국한 그는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귀국 작품전을 열었는데 당시 언론들은 해방이후 처음 있는 대성황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손동진은 ‘에꼴 나쇼날 쉬페리에데 보자르(파리 국립미술대학)’을 다닌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점에서도 국내 화단의 관심은 그에게 집중했다. ‘시실리의 환상’ ‘오달리스크’ ‘인공낙원’과 같은 작품은 서구적 고전과 동양적 감성의 탁월한 조화를 성취했으며 특히 구상에서 비구상에 이르는 과정이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얻었다. 1960년부터 77년까지는 서울대 미대와 세종대에 교수로 있으면서 국내외적으로 굵직한 미술전에 참여하게 된다. 1962년의 ‘뉴욕현대미술전’, 69년의 ‘브라질 쌍파울로 비엔날레’, 72년 ‘동경국제전’등의 국제 미술행사와 네차례의 개인전 그리고 한국의 구상, 비구상계열의 최고급 중진들과 함께하는 ‘신상회’를 통해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가 재차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는 1976년까지의 국내 활동에서는 주로 한국적 풍토의 이미지를 강하게 비구상화시키는 과정의 ‘탈춤’ ‘기마상’ ‘반월성’같은 작품으로 우리 가까이 있는 한국적인 것 또는 고향적인 것에 집중했다. 그의 두 번째 파리 시절에는 62세의 나이로 Exposition d`Art 콩쿠르에서 대상을, 1983년에는 Exposition d`Art Plastique(조형미술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이 상은 파리의 권위 있는 미술상으로 미술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길이기도 하다. 손동진이 현대화가로서의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치열한 세계 화단에서 당당히 그들이 자랑하며 앞서있다는 현대미술 그것도 비구상화로서 21세기 화단의 대열에 나란히 서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일흔이 훨씬 넘어 귀국한 노 화가는 1997년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선출되는 영광을 얻게 했다. 경주가 낳은 문학계의 거두 김동리, 박목월과 함께 그는 경주예술의 자존심을 우뚝 세운 지존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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