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여년 전에, 필자가 처음으로 황성공원 뒤에 있는 간묘(諫墓)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과나무 숲 사이로 탱자나무 오솔길이 미로처럼 꼬불꼬불 나 있었다. 간묘 지점에 이르러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니, 봉분 묘역만 근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주변은 온통 과수원으로 개간돼 농가 자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갓은 무겁고 몸통이 허약한 묘비가 구부정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지금과 같다. 그때는 과목(果木)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무질서한 콘크리트 건물 숲에 가린 채 방치돼 있다.
‘삼국사기’에 김후직(金后稷)은 신라 진평왕 때 병부령(兵部令) 벼슬을 했다. 왕이 사냥을 좋아하자 그는 안으로 여자에 빠지고 밖에서 사냥으로 헛되이 세월을 보낸다면 나라 망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거듭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죽음에 임한 그는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신하된 몸으로 임금의 잘못을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 임금이 사냥을 지나치게 좋아해 혹 나라가 위태로움에 이를까 두렵다. 내 죽어서라도 임금의 잘못을 일깨우려 하니, 내 뼈를 임금님이 즐겨 다니는 사냥 길 곁에 묻어다오.’라고 했다.
어느날 진평왕이 사냥을 나가는 데 어디선가 ‘왕이시여 사냥을 가지 마시옵소서’ 하는 소리가 들였다. 왕이 신하들에게 그 소리 난 곳을 물으니, 신하들은 후직이 죽으면서 남긴 말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사냥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김후직의 무덤은 어떻게 관리돼 전승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신라 이후 경주 사람들은 그의 묘를 ‘간묘’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잊지 않고 점지(點指)하며 구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주변은 잡초가 뒤덮이고 농지로 개간했지만 그의 무덤만은 온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신라 56왕 가운데 영조 때 능호가 밝혀진 것은 11기에 불과했고, 왕후 및 수많은 귀척대신들의 무덤은 유경(幽徑)에 묻힌 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그의 묘는 더욱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윤 남지훈(南至薰)은 기축년(1709) 7월에 부임했다. 그는 2년 남짓 재임하면서 종래 ‘부선생안(府先生案)’을 새로 편성하고, 김유신 묘에 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김후직 묘 곁에 ‘신라간신김후직묘(新羅諫臣金后稷墓)’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동경지(東京誌)’를 보면 진평왕이 사냥을 좋아하자 공이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공은 죽음에 임해 그 아들에게 ‘내가 살아서 임금님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
죽으면 내 뼈를 임금님이 다니는 사냥 길 곁에 묻어라.’고 말했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어느 무덤에서 ‘왕이시여 사냥을 가지 마시옵소서’인 듯한 소리가 들렸다. 왕은 전후 사실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며 마침내 다시는 사냥을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묘간(墓諫)이라고 불렀다. 아, 슬프다. 죽어서도 임금의 잘못을 간했던 사람은 천 년 역사에 오직 사어(史魚)일 뿐이다. 그러나 묘간은 사어에 비한다면 더욱 열렬한 충간이다. 고금에 전해오는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잡초 우거진 길가에 작은 비석조차 없다. 꼴 베는 아이들이 무덤에 올라가 놀며 불을 질러도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여기 몇 글자를 적어서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려 한다.
경인년(1710) 겨울에 부윤 의령 남지훈(南至熏)이 짓다.
사어(史魚)는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의 때 충신이다. 그런데 김후직의 무덤을 일반적으로 ‘간묘(諫墓)’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묘간(墓諫)’이라 했는데, 이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간묘라 하면 충간을 하다가 죽은 자의 무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지만 묘간이라 하면 죽어서 무덤에 갔어도 간했다는 말이다.
후자의 말이 훨씬 더 사실에 근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윗사람의 잘못을 알고도 바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 아래 사람의 바른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윗사람은 계림중학교 뒤에 있는 묘간(墓諫)을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