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리(화천리) 화천은 경부고속전철 신경주역사가 들어서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벽도산과 단석산 준령이 빚어낸 넓은 골짜기에 자리한 이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마치 꽃 같다고 하여 ‘꽃내’, ‘곶내’, ‘고내’로 불리다가 한자 표기에 의해 ‘화천(花川)’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냇가에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꽃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화천은 뒷들·뒷골·적치·숲골이 화천1리, 욉실·섶밭마을·개오지골이 화천2리, 백석·태봉·새터가 화천3리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양앵두 최대 생산지 화천1리는 골짜기의 어귀에 해당하는 광명 안쪽에 자리한 마을로 140가구 가운데 현재 거주는 110가구 정도이며 인구는 290명이다. 주로 벼농사와 축산에 의존하고 있고 한우 400두, 젖소 200두를 기르고 있다. 화천2리는 뒷들마을(1리) 동쪽의 벽도산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우리나라 양앵두(체리)의 55%를 생산하는 곳으로 11ha에서 연간 2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벼농사보다 과수 소득이 더 많다. 옛날에는 사과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기후변화로 병충해가 많고, 노동력이 부족해 차츰 줄어들어 현재 5ha정도 재배하고 있다. 그 외에 한우 320두, 젖소 80여두를 기르고 있다. 73가구에서 18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화천3리는 안쪽 골짜기 백석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복분자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복분자로 100여 가구가 연간 2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그 외에 사과 13ha, 한우 58농가에서 600두 정도 기르고 있다. 현재 총 148가구에서 3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화천에서 최고령자는 올해 100살인 최말수(학산댁) 할머니로 내남 비지 학동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고 한다. 귀도 총명하고 지금도 밥하고 집안일을 돌볼 정도로 아주 건강하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최 할머니는 음식은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데 적게 먹는다고 한다. 붉은 꿩 그림으로 꿩 쫒아 뒷들 화천리의 중심마을이며 가장 큰 마을로 뒤에 비옥한 들이 있어 ‘뒷들’, ‘후평(後坪)’, ‘뒷들마을’이라고 했다. 옥산전씨 집성촌(30가구)이다. (80가구) 뒷골 뒷들마을의 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뒷골’, ‘후곡(後谷)’이라고 한다. (10가구) 적치(赤雉) 이 마을은 꿩이 많이 날아와 농작물 피해가 심해 풍수에게 물었더니 이곳 지세가 꿩이 불에 타는 형국이라고 하며 붉은 꿩을 그려 놓으면 될 거라고 했다. 말대로 붉은 꿩을 그려 밭 주위에 붙였더니 그 후로 꿩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적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뒷골 동남쪽에 있다. 밀양박씨 집성촌(5가구)이다. (20가구) 숲골 숲이 있던 곳에 마을이 들어서 ‘숲골’이라고 한다. ‘매화동’이라고도 한다. 뒷들 남쪽에 있다. (7가구) 욉실 마을이 외진 곳에 있어 ‘욉실’이라고 했다. 또 물이 구슬처럼 맑다고 하여 ‘옥수(玉水)’라고 불렀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마을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흙탕물이라 ‘오수(汚水)’, ‘오실’이라고 불렀는데, 은진송씨 성을 가진 한 부인이 경주김씨의 아들을 데려다가 어려운 가정살림에도 훌륭히 키웠는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3등공신이 되었다. 그 후 마을이름을 ‘옥수(玉水)’, ‘옥동(玉洞)’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새밭마을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은진송씨가 20가구정도 된다. (40가구) 섶밭마을 마을이 섶밭 옆에 있다고 하여 ‘섶밭마을’, ‘섶들’ 혹은 ‘신전(薪田)’이라 불렀다고 한다. 욉실과 뒷들에 살던 주민들이 이주해 만든 마을로, 뒷들 동남쪽에 있다. (30가구) 개오지골 섶밭마을 남쪽 약 1km 되는 작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살던 범이 인근 마을의 개를 물어다 잡아먹고 개 뼈가 쌓인 골짜기라 하여 ‘개오지골’ 혹은 ‘견골곡(犬骨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이 없다. 동제 화천1,2리가 동제를 같이 지낸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제를 지낸다. 당목 적치마을에 있는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본래 이 제당은 섶밭마을 앞 거랑가에 소나무가 숲을 이룬 당나무숲에 있었는데 40년 전 홍수로 인해 거랑이 파고 들어와 소나무를 베고 당집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뒷산에 흰돌 많은 ‘백석’ 백석(白石) 마을 뒷산에 흰 돌이 많아 ‘백석’, ‘백속’, ‘고백리(古白里)’라고도 한다. 화천의 위쪽이 됨으로 ‘윗동’이라고도 한다. 태봉(胎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도 뒷산에 흰 돌이 있다. 경주최씨(30가구), 경주이씨(20가구) 집성촌이다. (60 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제를 지낸다. 당목 마을 가운데 마을회관 앞에 있는 300여년 된 회나무로 가지 일부가 죽어가고 있어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태봉(胎峰) 신라 때 태자의 태를 묻었다고 ‘태봉’, ‘안태봉(安胎峰)’이라 부르는 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경주김씨 집성촌(10가구)이다. (20가구) 새터마을 약 150년 전 백석과 수박골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마을을 새로 일구었다고 한다. ‘신기(薪基)’라고도 한다. 태봉 남쪽에 있다. 경주최씨(30), 경주김씨(10) 집성촌이다. (40가구) 탑마을 백석 뒤(북쪽)에 있던 마을로 절이 있었던 곳으로 탑이 있어 ‘탑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탑재만 남아있다고 한다. 마을은 철거되고 없다. 임란 창의로 1등 공신 녹훈 화강서당(花岡書堂) 증 병조판서 옥산인 파수 전계신(全繼信)을 제향하기 조선 헌종 10년(1844)에 세웠던 화강사(花岡祠)가 있던 곳이다. 화강사는 고종 5년(1868)에 금령으로 헐렸다. 1931년에 그 후손들이 파수정이라는 정자를 다시 세웠으나 1991년 태풍 글래디스로 유실되었으며 1997년에 새로 지으면서 화강서원으로 개칭했다. 뒷들마을 경로당 동편에 있다. 공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는 경상좌수영의 우후(虞侯)로 있었다. 안의명(安以命)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무원종공신1등(宣武源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도천정사(桃川精舍) 밀양인 박응복(朴應福)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24년 벽도산 아래 뒷들마을에 세웠으며 1978년에 개축했다. 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하여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가 되었다. 안락재(安樂齎) 은진인 안락재(安樂齎) 송열(宋悅)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75년에 옥수에 지은 재사이다. 5칸인데 골판기와를 이었다. 대문 앞에는 숙인 월성최씨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각이 서 있다. 모익정(慕益亭) 경주인 화개당 이천량(李天良)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62년 도화산 아래 백석마을에 세웠다. 마을회관 동편에 있는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화석정(花石亭) 경주인 최상정(崔商貞)을 추모하여 그 후손 해필(海弼)이 일제시대 때 세운 정자다. 선바우산 아래 백석에 있다. 옥성재(玉成齋) 옥수동 동쪽 산기슭에 있는 경주김씨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언제 지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최근에 개축하면서 기둥과 벽체를 콘크리트로 모두 교체했다. 남편 따라 죽지도 못하고 화천리 효열각(花川里孝熱閣) 숙부인 경주이씨의 효열(孝熱) 행적을 기리려 1946년 화천리 범바우골에 세웠다. 이씨는 최영악(崔榮岳)의 아내로 시아버지와 병든 남편을 극진히 섬겼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기절했다가 깨어나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아버지와 어린 아이들 때문에 죽지 못하고 마음을 돌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시아버지 봉양과 어린 아들을 잘 키웠다. 훗날 아들 덕기(德基)도 효자로 이름났다. 백석 남쪽 내남 비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화천리석불좌상(花川里石佛坐像) 뒷들마을 도청정 마당 가운데에 있는 돌부처다. 화강암으로 다듬은 이 불상은 마모가 심하고 머리가 떨어진 상태로 무릎부위까지 흙에 묻힌 채 정자 앞마당에 서 있다. 항마촉지인과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화천리절터 옛날에 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들’이라 불리는 곳으로 앞들못 북쪽 약 200m 지점이다. 지금은 탑은 없고 주위에 탑재만 흩어져 있다. 약 30여년전 이곳에서 높이 20cm 가량의 불상 1구를 발견해 화천초등학교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그 소재를 알지 못한다. 백석암(白石庵) 백석산의 옛 절터에 근래 새로 세운 백석암이 들어서 있다.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이 절은 예로부터 기도에 영험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고 푸른 미남산 여제 망산 유혹 벽도산(碧桃山) 푸르다고 하여 ‘벽도산’이라고 했으며 높이 424m 마을 앞산으로 부자가 살아서 장자테라고도 한다. 건천읍과 율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산은 젊고 푸른 미남산으로 선도산, 남산과 더불어 여산인 망산을 사이에 두고 사랑싸움을 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석산(白石山) 흰돌이 많은 백석 서쪽에 있는 산으로 단석산의 지령이다. 태봉(胎峰) 적치 서남쪽 산으로 신라 때 어느 왕자의 태를 묻었다고 한다. 현재 고속철 역사의 서쪽에 있다. 선바우산 선바우가 있는 산으로 백석 서쪽 백석암 뒤에 있다. 마당재 백석산 정상부 남쪽에 마당처럼 넓은 산봉우리다. 두름바골 뒤골 서쪽에 있는 큰산으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두름바골’이라고 한다. 충무산 섶들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산으로 이 마을의 경주김씨 입향조 충무공이 피난살이를 했다는 곳이다. 둥굴재 내남면 망성리 둥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당재 내남 비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당나무가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없어졌다. ‘고냇재’, ‘큰고개’라고도 한다. 수박골재 수박골 위쪽에서 내남면 화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아잘래고개 뒷들 서북쪽에서 모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무하러다닐 때 길이다. 길방고개 ‘질뱅이고개’라고도 부르며 뒷들 서북쪽에서 모량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모량장이 설 때는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파디미고개 적치에서 서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로 나뭇길이다. 장군 될 아이 빨래 돌로 눌러 범바우골 범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백석남쪽 효열각 앞에 있는 골짜기다. 산수골 백석산 맞은편 골짜기로 경주최씨 석화(石花)문중의 산소가 많이 있어 ‘산소골’이라고도 한다. 수박골 새터마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용래골 용이 꼬리를 쳐서 생겼다는 길이 150m, 폭 10m 정도의 골짜기로 ‘용래곡(龍來谷)’, ‘용미곡(龍尾谷)’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 마을 경주김씨가 산소를 잘 쓰고 옥동자를 얻었는데 생김새가 비범하고 상서로운 징조가 장군이었다. 점술가에게 물으니 “장군 아니면 역적이 된다.”고 해 문중에서 의논 끝에 빨래 돌로 눌러 아이를 없앴다. 그러자 이 골짜기에 용이 나타나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꼬리로 바위를 치며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새밭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이 골짜기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웃뒷골 뒷골마을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신흥골 섶들 동남쪽 용래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화천 경주김씨 입향조 충무공이 피난살이를 했다는 충무산이 이곳에 있다. 물탕골 물이 많이 난다고 하는 벽도산 남쪽 골짜기다. 이곳에는 묘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물을 마셨다고 한다. 칠미기골 메기 7마리가 물을 먹는 형국으로 백석마을 서쪽에 있다. 범바우 백석산 아래 효열각 앞에 있는 바위로 범이 와서 이 바위에 앉아 자주 울었다고 한다. 선바우 백석암 뒤에 우뚝 서 있는 바위로 산 아래 마을에서 올려다보아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큰 바위다. ‘입암(立岩)’이라고도 부른다. 평풍바위 뒤골 서쪽 큰 산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바위다. ‘고천’은 ‘고내’로 표기해야 고내 백석 안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화천을 가로질러 흐르는 도랑으로 ‘곶내’, ‘꽃내’, ‘화천(花川)’이라 불린다. 최근에 이 도랑을 ‘고천’으로 표기한데가 많은데 이것은 본래 이름 고내에서 “고”를 따고, 한자표기 화천에서 “천”을 따서 합성한 말로 바로잡아야 한다. 경주시도 고천으로 표기하고 있다. 뒷들 뒷들마을 뒤에 있는 들로 ‘후평(後坪)’이라고도 한다. 앞들 탑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참남들 참나무가 있었던 들로 백석 남쪽에 있다. 꽃뒤미 현재 고속전철역사가 들어서는 곳으로 ‘화두평’, ‘옥화들’이라고도 한다. 백석지(白石池) 백석 서쪽에 있는 못으로 백석암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백석못’이라고도 한다. 안산못 뒷골 남쪽에 있는 못으로 마을 앞에 있어 ‘안산지’라고 한다. 앞들에 있어 ‘앞들못’이라고도 한다. 뒷골못 뒷골 서쪽에는 5개의 못이 있는데 이를 모두 ‘뒷골못’이라고 한다. 돌담못 뒷골 서쪽에 있는 뒷골못의 하나로 못안에 돌축이 있어서 ‘돌담못’이라고 한다. 맨 위에 있어 ‘윗뒷골못’이라고도 한다. 살구나무못 뒷골 서쪽에 뒷골못의 하나로 못둑에 살구나무가 있다. 새못1 뒷골 서쪽에 뒷골못의 하나로 최근에 새로 막은 못이다. 새못2 뒷골못 동쪽에 새로 만든 못이다. 신택지 백석마을 남쪽에 있는 못으로 1962년도에 새로 막았다. 욉실못 욉실에 있는 못으로 옥수동 남쪽에 있다. 신흥골못 일제시대에 막은 옥수동 동쪽 용래골 어귀에 있는 못이다. 참남들못 백석마을 남쪽 참남들에 있는 못이다. 소발테 벽도산기슭에 있는 바위로 소발자국과 장군 발자국이 찍혀있다. 퇴거로 새마을지도자 박경대씨가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을 우회시키고 길을 닦아 마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길 이름을 ‘퇴거로’라고 한다. 경주초등학교 화천분교 지난 1963년 화천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99년 9월 경주초등학교 화천분교로 편입되었다. 현재 재학생은 8명이다. 지방도 확포장 및 농수로 정비 이 마을은 고속철도 신경주역사 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한 상황이다.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기대감으로 많은 투자자들이 몰려 땅값이 많이 오르고, 외지인들의 땅 매입으로 묵혀 놓은 토지가 많다. 이 마을은 상당한 변화가 예상되는 곳으로 지금의 마을 형태가 언제까지 보존될지 의문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904호 지방도로 확포장 공사와 농수로 정비를 바라고 있다. 이 마을출신으로는 송덕수(65 전 경주교육문화회관 사장), 송재원(55 경북대교수), 최병준(55 근화여고 교감), 홍염도(54 경주시청 공보전산과장), 김종관(52 육군 중령), 박찬영(42 경주경찰서 정보과장), 최차림(54 육군 대령), 박준홍(40 공군 소령), 신동철(39 육군 소령), 최영훈(38 공군 소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마을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이남미 간사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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