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16. 흔히 경주 최 부자를 12대 만석과 9대 진사를 배출한 명문으로 꼽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12대 만석은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1568~1636)에서 문파 최준(崔浚, 1884~1970)까지를 말한다. 이들이 충의 가문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경제적 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은 지금의 교촌이 아닌 내남면 이조리다. 12대의 직계 상조 가운데 이조리에 살았던 세월은 7대에 걸친 2백 여 년이 넘고, 교촌으로 옮겨온 것은 5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 최 부자라 하면 교촌 최 부자를 말하고, 이들은 줄곧 교촌에 세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용암(龍庵) 최기영(崔祈永, 1768~1834)은 7대째 부를 물려 받은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니 아버지 최언경(崔彦璥)이 직접 글을 가르쳤고, 성장하여 지잠(芝岑) 유영로(柳榮魯)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성품이 단아 고결하고 재능과 도량이 높아서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으나 남을 대할 때에는 온후하였다. 용암은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나 과거 시험을 볼 때마다 떨어졌다. 만석의 부를 누렸지만 과거에는 운이 없었다. 조부 최종률은 사마시에 합격한 지 3일 만에 죽었고, 아버지도 과거에 여러 번 응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족숙 최벽이 계묘년(1783)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피선되자 마음은 더욱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용암은 명예와 부를 다 가질 수 없다하고, 본가 이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남산 틈수골에 와룡암(臥龍庵)을 짓고 은거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46세 되던 갑술년(1814)이다. 와룡은 앞면이 7칸이고 측면이 2칸인 목조 건물로, 지형에 걸맞게 아담하고 우람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은 협곡이다. 용악산(龍岳山)의 좌우 계곡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흘러내리는 합수구(合水口)의 오지이다. 그는 대장부로서 나라의 부름을 받지 못하면 자연에 묻혀 살아야 하고, 재주가 미치지 못해서 세상에 쓰이지 않으면 채산조수(採山釣水)로써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용암은 주변에 진귀한 나무와 화훼를 심고 물을 끌어다 못을 만들어 경관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서책을 쌓아두고 스스로 흡족한 삶을 즐기니, 각지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그의 족친으로 최인간, 최남복, 최옥, 최수와 창려 이정기, 죽오 이근오 등 이름 높은 선비들이 모여 많은 시편을 남기고 술을 즐기며 세상일을 잊었다. 당시 와룡암 고유문은 최벽이 지었고, 서문은 수운 최제우 선생의 아버지 최옥이 지었다. 뒷날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으나 와룡암 가장자리에 법당을 만들어 목불(木佛)을 모셔두고 최씨 가문의 평안과 강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용암이 와룡암을 지은 지 2년 후 병자년(1816)에 그의 큰아들 최세린(崔世麟)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가문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또한 용암 자신도 과거 공부를 꾸준히 하여 그의 나이 58세가 되던 을유년(1825)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뒷날 용암이 죽은 뒤 둘째아들 최세구(崔世龜)가 경자년(1840) 사마시에 역시 합격하자, 3부자의 삼연(三蓮)이 한 집안에 활짝 피었던 것이다. 한편 용암은 이조리의 옛 집을 떠나 새로운 길지를 물색하였다. 마침내 그는 신묘년(1831) 9월에 이조리에서 교촌의 향교 부근에 새 터를 정하고 들어왔는데 그것이 지금의 교촌 최 부자집이다. 교촌은 본디 승지로 꼽히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학궁(學宮)과 사마소가 지척의 거리에 있고, 읍성이 가까워 여러 가지 편의한 점이 많았다. 이곳으로 이사한 최씨 가문은 더욱 명성을 떨쳤다. 12대 만석 가운데 용암에 이르러 부와 명예가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 조선의 부자라면 ‘영남의 최씨’라고 일컬어졌던 시기도 이 때이다. 그러나 용암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문사들과 더불어 집 앞에 있었던 사마소를 자주 찾았고, 이따금 와룡암에서 시속을 잊은 채 시와 술로 소일하곤 했었다. 용암 이후 와룡암은 교촌 최 부자의 별장으로 활용되었다. 동남으로 지나가는 명사들이 최 부자집을 찾아오면 이곳 와룡암으로 모셔 특별히 접대하였다. 따라서 수많은 문인과 과객이 하루 밤 묵기를 원했던 곳이 와룡암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경주 최 부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격동기를 맞으면서 마침내 기울어졌다. 와룡암 최 부자의 사랑채는 1971년 9월에 화재로 전소되었고, 11년이 지난 1982년 4월 19일 이곳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의 분란으로 인해 본채와 오른쪽 요사채 역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 와룡암 사찰 뒤 텃밭이 그 자리이다. 동구 들어오는 숲 사이에 서 있는 ‘와룡통천(臥龍洞天)’의 표석만이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