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 쌓은 것 같은 기둥모양 바위군락 하서는 동대산 삼태봉(629m)이 동쪽으로 흐르다 동해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멈춰선 산기슭에 의지한 해안마을이다. 양남면소재지로 행정, 교육, 상업의 중심이다. 하서는 본래 서촌(瑞村) 아래쪽 마을이라 ‘하서(下瑞)’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6부 가운데 금산가리촌에 속했던 양남은 서촌(瑞村)으로 불렸다. 그 가운데 위쪽에 해당하는 서동(瑞洞) 일대를 ‘웃서’ 또는 ‘상서(上瑞)’, 환서(環西) 일대를 ‘중서(中瑞)’, 그 아래는 ‘하서(下瑞)’, 나아 일대는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나이 많은 분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양남지역에 서동, 하서, 환서, 신서 등 유독 ‘서’자가 들어가는 땅이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서동(瑞洞)’을 제외한 나머지 땅이름은 모두 ‘서(西)’를 쓰고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역사와 전통을 되찾기 위해서 반드시 바로잡아야한다. 하서거랑 북쪽 2·4리는 본디 한마을 하서는 양남면사무소와 양남초등학교가 있는 ‘하서(장테)’를 하서1리, 양남초등학교 뒤쪽의 ‘다래’·‘애일’을 하서3리, 하서거랑 북쪽 ‘망정’·‘오리골’·‘후동’을 하서2리, 하서거랑 북쪽 바닷가 ‘진리’를 하서4리 등으로 구획하고 있다. 본래 하서거랑 남쪽은 1리, 북쪽은 2리로 구획되어있었는데, 마을을 다시 분구하면서 1리를 나누어 3리, 2리를 나누어 4리로 분리했다. 아직도 1리와 3리, 2리와 4리가 한마을이나 다름없다. 2007년 6월에 1리와 3리를 보도했고, 이번에 2리와 4리를 같이 묶어서 보도한다. 하서는 경주시청 기준 37km, 50분 거리에 있다. ‘하서(下西)’는 ‘하서(下瑞)’로 고쳐야 하서2리는 동대봉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서거랑의 북쪽에 자리한 ‘망정’·‘오리골’·‘후동’ 마을이다. 총 67가구, 150명의 주민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한우 30두 정도를 기른다. 하서4리는 하서거랑 북쪽의 해안에 자리한 ‘진리’를 말한다. 총 84가구에 181명으로 남자 105명, 여자 76명이다. 이 마을은 바닷가 어촌마을로 절반에 해당하는 40가구가 농업과 어업을 겸한 반농 반어민이고 나머지는 한전사택 등으로 직장인이다. 한우 40두정도 기르고, 청정해역으로 미역(1억), 전복(2억) 등 해산물이 많이 나 연간 3억원정도의 매출을 올린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망정에 김화석(97 수국댁) 할머니로 아주 건강하셨는데 최근 노환으로 아들집에 가 계신다고 한다. 괴화나무 정자가 그리워 망정(望亭) 이 마을에 커다란 괴화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으나 오래되어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그리워하고 바란다는 뜻에서 ‘망정’, ‘망괴정(望槐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지금은 14가구가 남아 있다. (30가구) 동제 이 마을은 동제를 매년 6월과 10월 초순에 날을 받아서 지냈으나 지금은 6월에만 지낸다. 당목 마을 어귀의 마을회관 동쪽에 회나무, 소나무 등이 당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오리골 오리나무가 많은 골짜기가 있어 ‘오리골’, ‘올골’, ‘오곡(梧谷)’이라고 한다. 지금도 오리나무가 많다고 한다. 망정 서북쪽에 있다. (17가구) 동제 해마다 1월, 10월에 동제를 지냈는데 3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당목 오래된 느티나무를 당나무로 섬기고 있다. 뒷마을 하서 북쪽, 진리 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뒷골’ 혹은 ‘뒷마을’, ‘후동’이라 했다. 경주손씨 집성촌으로 지금은 4가구가 있다. (20가구) 동제 매년 음력 6월과 10월에 동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6월초하루에만 지낸다. 당목 마을 입구 왼쪽 언덕배기에 있는 당나무 숲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회나무 등이다. 박제상 배타고 떠났다는 전설 진리(津里) 하서 동쪽 해안 마을로 신라 때부터 ‘율포(栗浦)’, ‘율리(栗里)’로 불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훗날 나룻배로 오가는 마을이라 하여 ‘진리(津里)’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신라 눌지왕 때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미해왕자를 구하기 위해 충신 박제상이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갔다는 기사에 등장하는 ‘율포’가 이 마을이다. 실제로 이 마을 동쪽 해달돌 안쪽 해안에는 박제상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일부에서 율포가 정자라는 주장이 있으나 ‘진리’와 ‘정자’가 인근지역으로 다 같이 율포현에 속했었고 울산 출신인 김석봉이라는 사람이 정자라고 주장한 내용을 학계에서 인용한 탓으로 보인다. 최근 정자에는 박제상 기념비까지 세웠다. 앞으로 바로잡아야할 부분이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20가구), 김녕김씨(10가구) 집성촌이다. (84가구)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음력 6월과 10월에 동제를 지냈으나 7~8년 전부터 6월 초하루에만 동제를 지낸다. 당목 마을 동쪽 언덕에 서로 껴안은 듯 가지를 교차하며 나란히 서 있는 수령 300년이 넘은 회나무와 사철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회나무를 할배나무, 사철나무를 할매나무라고 부르며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목책으로 만든 성 영모재(永慕齎) 밀양인 박수생(朴守生)을 추모해 그 후손들이 1979년 망정에 세운 재실이다. 공은 조선 숙종 3년(1617) 선산군 옥성면에서 이곳 오리골에 이주해온 이 마을 밀양박씨 입향조이다. 목성만디 올골 남쪽 산에 있는 목책의 성이 있던 자리다. 흙이나 돌로 성을 만들기 어려울 때 목책(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막아)을 쳐 적의 침입을 막은 목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목성말랭이’라고도 부른다. 못 하나와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밭으로 개간했다. 하서지봉수대(下西知烽燧臺)터 진리 북쪽 등성이에 있던 봉수대의 터로 옛날엔 하서를 ‘하서지’라고 불렀다. 이 봉수대는 남쪽의 울산 남목봉수대와 북쪽 독산봉수대, 서쪽 대현봉수대를 연결했으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봉우제’라고도 하며 마을주민들이 화전놀이를 하던 곳이라 ‘화전테’라고도 한다. 진리(津里)나리 진리 앞에 있는 일제시대에 생긴 나루로 ‘하서나리’라고도 한다. 파도가 높으면 읍천항에 있던 배들도 이곳으로 피난 왔다고 할 정도로 나루가 좋았다고 한다. 아기들 무덤 홍수로 떠내려가 오바산 하서, 환서, 읍천의 경계지점에 있는 산으로 망정 북쪽에 있다. 민쟁이 올골 서쪽에 있는 산 고개로 이 재를 넘으면 신서로 연결된다. 화전대 만딩이 화전놀이를 했다고 하는 높이는 72m 등성이로 하서와 읍천의 경계지점에 있는 봉수대자리이다. 한밭골 신라 때 목성만디에 말 먹이는 목장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있어서 ‘한밭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올골 뒷산에 있다. 홍수골 뒷골 동북쪽의 작은 골짜기로 옛날에 홍진을 하다 죽은 아이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홍수 때 모두 바다로 떠내려갔다고 하여 ‘홍수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버들골 진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감남골 홍수골과 버들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무가 있었다. 모래 많아서 ‘사락들’ 뒷절 옛날에 북사(北寺)라는 절이 있던 들로 망정 서쪽에 있다. 뒷적들 망정마을 북쪽에 있는 들로 마을 뒤에 있어 ‘뒷적들’이다. 사락들 올골 앞에 환서와의 경계지점에 있는 들로 모래가 많아서 ‘사락들’이라고 했다. 민솔뱅이 주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산소가 있는 들로 망정 동쪽에 있다. 긴들 진리 동북쪽 언덕배기에 있는 들이다. 진리 뒤에 있어 ‘뒷밭들’이라고도 한다. 길이가 길어 긴들이라고 한다. ‘재방들’이라고도 한다. 최근에 한전사택이 들어섰다. 개쳇들 진리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버들골들 진리북쪽 버들골에 있는 들로 버들골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 새로 나는 31번국도 부지로 편입되어 들이 없어질 예정이다. 민솔배깃보 뒷절들에서 시작해 망정과 뒷마을 앞을 거쳐 진리까지 연결된 보로 옛날에는 이 물로 밥도 짓고, 빨래도 하는 등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지금은 물이 마르고 보가 활용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 개챗들보 하서도랑에서 물을 받아 개챗들에 물을 대는 보로 지금은 없어졌다. 애수굴 여우가 많이 나온다고 하는 굴이다. 곰피 많이 붙은 바위 모두를 ‘곰푸개’ 곰푸개 곰피가 많이 붙어 있었던 바위로 이 일대의 바위를 통털어 ‘곰푸개’라고 한다. 진리 동쪽 해안에 바위무리를 총칭해서 부른다. 장수돌 장군들이 공기돌로 사용했다는 둥근 바위 2개가 있다. 최근 3년전에 그 옆에 체육공원을 만들어 등산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올골 서쪽에 있다. 새듬 진리 동쪽 바다물밑에 있는 바위다. 동쪽을 ‘새’, 물밑에 있는 바위를 ‘듬’이라고 한다. 새용철듬 용철이듬 동쪽 물밑에 있는 바위라 ‘새용철이듬’이라고 한다. 가부리듬 모양이 마치 가부리(가오리)처럼 생긴 바위로 용철이듬 동쪽에 있다. 궁기돌 구멍이 뚫려 있는 바위로 새듬 동쪽에 있다. 경주 말로 구멍을 ‘궁기’라고 했다. 금릿돌 곰푸개에 있는 돌로 배기돌 동북쪽에 있다. 다릿돌 징검다리처럼 놓인 진리 동쪽에 있는 바위로 ‘교암(橋岩)’이라고도 한다. 대구밧굼 대구의 아가미처럼 생긴 용철이듬 서쪽에 있는 바위다. 뚜끼비돌 진리 남쪽에 있는 두꺼비처럼 생긴 바위로 방파제 동쪽에 있다. 남쪽(마) 물밑바위(듬) ‘마듬’ 마듬 진리 남쪽에 물밑에 있는 바위다. 남쪽(마) 물밑바위(듬)라는 뜻이다. 마용철듬 용철이듬 남쪽 물속에 있는 바위다. 배기돌 용철이듬 서북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 작은 배들이 지나다녔다고 한다. 참새미돌 근처에 찬물이 나는 샘이 있다는 바위로 용철이듬 북쪽에 있다. 용철이듬 모양이 용처럼 생긴 바위로 새듬 남쪽에 있다. 술방간 다릿돌 서쪽에 있는 바위로 작은 웅덩이와 술 마시고 노는 평평한 자리가 있다. 시퍼럼 용철이듬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이지점이 깊어 물밑이 시퍼렇다. 해다릿돌 해달(물개)가 많이 잡혔다는 바위로 새듬 남쪽에 있다. 해달돌 안쪽은 박제상이 배를 타고 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벼락맞은돌 뚜께비돌과 농돌 사이에 있는 벼락을 맞았다는 바위다. 농돌 벼락맞은돌 동쪽에 농처럼 생긴 바위다. 석주모양 바위군락 진리와 읍천 사이 약 1km의 해안에 마치 사람이 깎아서 쌓아 놓은 것 같은 기둥모양의 직육면체 석주들이 산더미처럼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는 바위 군락으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새마을 사업 등으로 마구 훼손하여 아름다운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뒷절들 용도변경과 해변 휴양림조성 하서2리 주민들은 뒷절들을 용도 변경해 공장을 유치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양남면 하수종말처리장을 유치하는 조건으로 뒷절들을 공업용지로 용도변경해주겠다는 경주시장의 약속이 있었는데 아직 추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하서4리 진리는 해안마을로 바다경치가 아름답고 백사장이 좋아 2005년 현대중공업과 1사1촌 자매결연해 현대중공업에서 여름휴양처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2005년부터 바닷가에 휴양림을 조성하고 있는데 현재 60%정도 진행되고 중단된 상태다. 주민들은 이를 빨리 추진했으면 하고 바란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한곤(81 전 양남우체국장), 김종규(77 대구 전 초등학교 교장), 김영호(73 전 양남농협 조합장), 최태영(65 예비역 육군 중령), 김정규(57 예비역 해군대령), 김종구(41 행정고시 서울시청), 박재신(33 박사 포항공대)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 주신 최동화(2리), 김장수(4리) 이장과, 김종곤(4리)노인회장을 비롯한 마을어른들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이남미 간사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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