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실리(入室里)
기축년 새해가 밝았다. 희망보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많아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소처럼 우직하게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걷다보면 어느덧 천리에 다다르지 않을까 싶다.
입실은 골짜기가 세운 것 같다 하여 ‘입곡(入谷, 立谷)’이라하던 것이 변해서 ‘입실(入室)’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경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 ‘입실(入室)’ 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외동읍 소재지로 외동읍사무소와 입실초등학교, 외동중학교, 입실우체국, 외동농협, 외동지구대, 외동소방파출소, 입실역, 입실시장 등이 이 마을에 있다.
입실·장터가 입실1리, 본동·수북·갓밑·신기·토점이 입실2리, 순금·관거리가 입실3리를 이루고 있다.
외동읍 소재지로 행정, 교육, 상업의 중심
입실1리는 읍 소재지 상가중심 마을로 총 390세대, 1150여명 가운데 농가는 80세대에 불과하고 상가가 200세대 정도이다.
입실2리는 입실거랑 남쪽과 입실 동쪽 일대에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마을이다. 그러나 최근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1970년대부터 삼아아파트, 영수아파트 등이 이곳에 들어섰다. 총 750세대에 25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이 가운데 농가가 150세대이다.
입실3리는 동해남부선 철길과 7번국도 서편에 자리한 농가마을이다. 총 350세대에 9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농가는 100세대 정도이다. 입실은 상가와 농가, 직장인이 조화를 이룬 도농복합형 마을로 농가의 경우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그 외에 포도(7천평)와 한우(800두)를 기르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105살의 박인석(입실1리 551-20번지) 할머니로 건강이 아주 좋았으나 최근에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정신도 가끔 놓친다고 한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박 할머니는 채식위주로 규칙적인 식사와 소식을 한다고 했다. 젊었을 때 술과 담배를 많이 자셨다는 할머니는 80이 넘어서면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아파트 들어서면서 인구 늘어
입실(入室) 입실은 본래 ‘입곡(立谷)’이라했고 나중에 ‘입실(入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불국사와 원원사 사이에 많은 절이 있었는데, 불도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관문이라 하여 ‘입실(入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동제 입실1리 마을회관 동북쪽에 당나무와 당집에서 매년 음력 보름에 지낸다. 성지사 스님에게 위탁하여 모신다.
당나무 수령 60여년의 느티나무와 느릅나무를 당나무로 섬긴다.
장테 본래 논이었는데 구어에서 장이 옮겨오면서 시장이 되었다. 입실과 한마을인데 입실장 일대를 ‘장테’라고 부른다.
본동(本洞) 입실 동쪽 산비탈에 있어서 ‘번덕마을’이라고 하던 게 ‘본동’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마을이 위쪽에 있어 ‘웃마을’이라고도 한다.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영수아파트 포함 140세대)
수북(水北) 입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입실거랑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수북’이라 불렀다고 한다. 외동중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 동편에 해당한다. 청안이씨 집성촌으로 지금은 10여 가구정도 있다. (70세대)
약국마을 수북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약국이 있었다고 한다. (10가구)
신기(新基) 입실 동남쪽에 새로 들어선 마을이라 ‘새터’, 입실거랑 남쪽에 있어 ‘수남(水南)’이라고도 한다. 삼아아파트 등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마을이다. (510세대)
토점(土店) 입실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토기를 만들던 토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토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동쪽에는 쇠부리(철점)도 있었다고 한다. 쇠부리는 지금의 용광로로 울산 달천거랑에서 사철(砂鐵)을 수집해 솥·농기구와 병장기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7가구)
안점 토점 동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로 1가구가 살았으나 입실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
갓밑 입실 동쪽 말림갓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갓밑’이라 부른다. (13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성지사 스님에게 위탁하여동제를 지낸다.
당목 입실거랑 남쪽 현 외동읍민체육회관 자리에 느티나무와 포구나무가 당목으로 있었으나 30여년전에 큰물에 떠내려갔다. 지금은 제당을 지어 놓고 모신다.
쉰짐 곡식 나는 큰 밭
순금(舜琴) 옛날 이곳에 쉰짐(50짐, 반결)의 곡식이 났다는 큰 밭이 있어 ‘쉰짐’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순금’으로 변했다고 한다. 입실의 아래쪽에 있어 ‘아랫마을’이라고도 한다. 철도를 경계로 그 서쪽으로 최근 남정로얄 등 빌라가 많이 들어서 있다. (300세대)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스님을 모셔 동제를 지냈으나 힘이 들어 마을회의에서 올해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당목 순금마을 가운데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100여년 된다고 한다.
관거리(冠巨里) 이곳은 도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관을 쓰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관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새터 서남쪽에 있다. (50가구)
우물각단 순금마을과 한 마을인데 그 가운데에 우물이 있는 마을을 특별히 우물각단이라고도 부른다. 입실3리 마을회관이 있는 부근이다.
말에서 떨어져 71세로 순절
한강재(漢江齋)및 신재정(愼齋亭) 청안인 신재(愼齋) 이기(李基)의 덕행을 추모하여, 조선 고종 32년(1859)에 후손들이 토점 서북쪽 한강지 위에 세운 재실로 10여년전에 개축했다. 이기는 장기 현감을 지냈으며 입실 청안문중의 입향조이다. 그 후손에서 영풍정 이계수, 낙의재 이눌 등 임란창의 의사 16위가 나왔다. 신재정은 한강재 남쪽에 나중에 세운 부속건물이다. 이곳에는 청안이씨 임란창의의사 12위의 추모비가 나란히 서 있다.
영풍정(詠風亭) 선조 23년(1590) 청안인 영풍정(詠風亭) 이계수(李繼秀)가 세운 정자이다. 이계수의 자는 한서(漢瑞)로 명종 22년(1567)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문천회맹(蚊川會盟) 등에 참가 경주, 울산, 대구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용마양위부사직이 되었으며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격하던 중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에서 떨어져 71세로 순절했다. 지금의 정자는 1957년에 후손들이 신기마을 남쪽에 새로 세웠다.
봉서정(鳳棲亭) 안동인 잠재(潛齋) 권영(權嶸)을 추모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권영(1602~1664)은 임란공신 권순의 손자로 권진경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장군의 조카다. 강화에서 출생해 인조(仁祖) 때 경주로 왔으며 통정대부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이 정자는 울산시 북구 농소면 천곡리에 잠재정사(潛齋亭舍)로 있던 것을 조선후기에 이전했으며 1958년 본동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봉서정’이라 했다.
봉산사(鳳山祠)터 임란공신 경주인 우락재(憂樂齋) 최동보(崔東輔)와 아들인 병족당(幷足堂) 최여호(崔汝琥)를 제향하던 사당으로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워졌으나, 고종 때 금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봉서산 아래 본동에 그 터만 남아 있다.
최동보(崔東輔)는 임진왜란 때 중부 인(認), 계부 계(誡), 아들 여호(汝琥)와 함께 창의해 문천회맹과 팔공산회맹, 화왕산회맹에 참가했다. 순조 8년(1808)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대구 평천사(平川祠)에 봉향되었다. 아들 병족당은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
임란의사 44위(位) 충의 기록
임란의사충의비 외동 출신 임란의사 44위(位)의 용맹과 충의를 기록한 비석으로 2006년 3월 신기 동쪽에 세웠다. 외동읍민체육회관 동쪽에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 이전해야할 운명에 처했다.
입실리석탑(入室里石塔)터 삼아아파트 앞의 논에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폐탑이 있었는데 1973년 경주경찰서 신축 때에 경찰서 정원으로 옮겨갔다. 1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있고, 그 사이 4면에는 원형대좌 위에 서 있는 불상이 양각되어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남아 있는 것에 비추어 본래 쌍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를 ‘탑거리’라고 한다.
관음사(觀音寺) 입실과 구어 경계지점에 1970년대에 들어선 절이다. 이곳은 옛 절터로 일제 때 양각보살입상(陽刻菩薩立像)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당(佛堂)터 안점 서남쪽에 있는 불당의 터로 지금은 입실저수지에 편입되었다.
아기봉산 외동읍 입실리, 연안리, 냉천리, 구어리에 걸쳐 있는 높이 227m의 산이다. 정상에 마치 아기처럼 생긴 신령스런 바위가 있어 ‘아기봉’, ‘아기봉산’, ‘아암산(兒岩山)’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에는 ‘옛날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가보니 아기장군이 집채만 한 큰 바위를 짊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울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래서 이 산을 아기봉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아기장군 큰 바위 짊어지려
독새알 삐알 미리봉 북쪽 덜겅이 많은 비탈이다.
미리봉 정월 대보름에 달이 제일 먼저 솟는다고 ‘미리봉’, ‘명월봉(明月峯)’이라고 한다. 띠밭등 남쪽 산으로 갓밑 위에 꼭대기다.
범왕산(凡旺山) 새터 동쪽 산으로 마치 범이 웅크리고 내려다보는 형상이라 ‘범앙산’이라고도 부른다. 범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라 마을이 잘 안된다고 한다.
봉서산(鳳棲山) 외동읍 입실리와 모화리에 걸쳐 있는 높이 533m의 산으로 동대산의 줄기이다.
북봉 안점 동쪽에 북처럼 솟아 있는 산으로 ‘고봉(鼓峯)’이라고도 하며,
함박산 미리봉 동쪽의 높은 산으로 정사부에 넓은 평지가 있어 ‘함박산’이라고 한다.
넓적등 범왕산 북쪽 아래쪽에 있는 넓적한 등성이다.
띠밭등 입실 동쪽에 띠풀이 매우 많았던 등성이다.
벌밋등 양남으로 넘어가는 도로 남쪽, 저수지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옛날 묘가 많아 ‘벌밋등’이라고 한다.
설매봉 송골 동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알속등 입실 동남쪽 범왕산 아래에 있는 오목하게 생긴 등성이다. 범의 앞발 사이에 오목하면서 볼록하게 솟은 등성이다.
옻밭등 안점 서북쪽 등성이로 옻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등성이 아래에 쇠부리터가 있었다고 한다.
큰속등 범왕산 서쪽에 있는 큰 등성이로 범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둥둥골’ 왜놈 침입 때 둥둥 북 울려
둥디잇재(성령) 외동읍 입실에서 양남면 하서로 넘어가는 고개다. 동대봉산의 줄기인 이 고개는 왜구 침입하면 둥둥 북을 울려 알렸다고 하여, ‘둥둥골’이라 부르다가 ‘둥디잇고개’, ‘둥디골’ 혹은 ‘고고령(鼓鼓嶺)’이라고도 불렀다. 지형이 베틀의 바디처럼 생겼다 하여 ‘바딧재’, ‘바디령재’라고도 한다. 외동읍과 양남면·양북면의 경계를 이룬다.
큰재 입실 안점 동쪽에서 양남면 석촌리로 넘어가는 둥디잇재의 큰 고개다.
적은재 안점 동쪽에서 양남면 석촌으로 넘어가는 둥디잇재의 적은고개로 큰재 보다 낮아 ‘적은재’라고 한다. 백토(白土)가 많이 나 ‘힌디깃재’라고도 한다.
곧은골 평풍골 맨 안 골짜기로 똑바로 들어간다고 ‘곧은골’이라고 했다.
대밭골 대나무 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입실저수지 동남쪽 평풍골 서쪽에 있다.
대성골 곧은골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두리챗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두 번째 골짜기다.
둥디잇골 북봉 밑에 있는 입실저수지 안쪽골짜기 전체를 말한다. ‘둥둥골’이라고도 한다.
매탯골 첫골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다.
문바우골 문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복햇골 동쪽에 있다.
물탕골 안점 북쪽에 약물이 났다는 골짜기다.
복햇골 폭포가 있는 골짜기로 복해가 많이 찬다고 ‘복햇골’이라고 한다. 두리챗골 동쪽에 있다.
병풍처럼 둘러 있는 ‘아흔아홉골’
삼밭골 벌밋등 남쪽 골짜기로 옛날 산삼이 났다고 한다.
송골 범왕산 북쪽 골짜기로 ‘선골’이라고도 한다.
수영골 수정이 많이 났다고 하여 ‘수정골’이라고도 한다. 입실저수지 아래 골짜기는 ‘바깥수영골’, 저수지 안쪽은 ‘안수영골’이라고 한다.
용짓골 용제(기우제)를 지냈다는 골짜기로 옻밭등 남쪽에 있다.
제비골 지형이 마치 제비집처럼 생긴 골짜기로 곧은골과 홈갯골 남쪽에 있다.
종이티골 영수아파트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첫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첫 골짜기다.
평풍골 산이 평풍(병풍)처럼 둘러 있는 골짜기로 안점 동남쪽에 있다. 골짜기가 깊어 ‘아흔아홉골’이라고도 한다.
홈갯골 물을 대기 위해 홈통을 놓았던 골짜기로 문바우골 동쪽에 있다.
후리바웃골 안점 동북쪽 골짜기로 적은재 북쪽에 있다.
문바우 모양이 마치 문처럼 생긴 바위로 문바우골에 있다.
담뒤 수북 뒤에 듬벙이 있었던 들이다. 지금은 경지정리하고 없다.
상봇들 상보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로 입실 동북쪽에 있다. 위쪽에 있는 들이다.
중봇들 중보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로 상봇들 서쪽에 있다.
개발논 혈수정 서쪽에 있는 논이다.
곽답 중보 가운데 있는 논이다.
도티논 상보 동쪽에 있는 논이다.
마디논 중보 동북쪽에 있는 논이다.
밀랑논 중봇들 서쪽에 있는 논이다.
복숭아나무 자리 복숭아나무가 있었던 논으로 중보 서남쪽에 있다.
성채논 중봇들에 있는 논이다.
시루처럼 물 잘 빠진다는 논
시루논 시리(시루)처럼 물이 잘 빠진다는 논으로 상보 동북쪽에 있다.
원거논 원거라는 사람의 논이었다고 한다. 밀랑논 동북쪽에 있다.
은행나무 자리 복숭아나무자리 밑에 있는 논이다.
종율논 종율이란 사람의 소유였던 논으로 중보 동쪽에 있다.
지청구논 지청구(지칭개)가 많았던 논으로 개발논 동쪽에 있다.
진배비 상보 남쪽에 있는 긴 논이다.
탑거리 탑이 있었던 논으로 중보 서남쪽에 있다.
태수논 태수라는 사람의 소유였던 논으로 상보 동남쪽에 있다.
혈수정 상보 서쪽에 있는 논이다.
굴대지기 탑거리 북쪽에 있는 보다.
담뒷보 담뒤에 있는 보다.
상보(上洑) 맨 위쪽 상봇들에 있는 보다.
새보 담 뒤 위쪽에 새로 만든 보로 지금은 없어졌다.
자부리 중봇들 아래에 있는 보다.
중보(中洑) 상보 아래에 있는 보다.
텃보 중보 남쪽에 있는 보로 부근에 집터가 있었다.
입실천 입실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이다.
순금천(舜琴川) 입실에서 구어 앞으로 흐르는 도랑이다.
입실역(入室驛) 동해남부선 기차역으로 입실과 순금의 경계지점에 있다.
도시계획도로 및 주거환경개선
입실은 외동의 중심이지만 기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발전이 더디고 인구유입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입실의 도시계획도로는 이미 30년전에 계획되어 있지만 추진이 되지 않아 사유재산권 침해는 물론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이의 조속한 시행을 바라고 있다.
또 외동은 공장이 600개가 넘는데도 주거환경이 개선되지 않아 인구유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따라서 발전도 늦다고 한다. 특목고를 비롯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바라고 있다. 그 밖에도 재래시장 활성화와 울산시내버스의 입실운행을 바라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해길(75 전 도의원), 권영해(74 전 국방부장), 이한수(74 전 대구 북구 경찰서장), 김두봉(64 전 경주시의원), 최상군(62 예비역 육군대령), 이명철(59 울산경찰청 보안계장), 김순직(57 전 디자인서울시본부장), 김일헌(51 경주시의원), 이진락(47 경주시의회 부의장)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박현동(1리 이장), 이영길(2리 이장)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이남미 간사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