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 인구 55% 차지한 집단주거단지 쇠고기파동, 고유가, 세계금융위기, 경기침체 등 희망보다는 절망, 기쁨보다는 아픔, 행복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안겨준 2008년이 저물고 2009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는 건강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한해였으면 좋겠다. 산대는 안강에서 가장 큰 마을로 어래산 남쪽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풍산금속과 우방아파트 단지, 안강여자중·고등학교가 이 마을에 있다. 안강 도심에 인접해 있고, 영천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와 우회산업도로를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최근 집단주거지역이 형성되면서 신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예로부터 산대 열두 마을이 안강 인구 3분의 2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도 안강 인구의 55%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황토 흙과 암석의 토대가 마치 산 같다해 ‘산대’, ‘산대방’, ‘산대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어래산아래 산처럼 나무가 많아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고 산대라고 했다고도 한다. 안강의 신도시로 부상 산대는 현재 10개 리로 구획되어 있으며 빔의골·새터가 1리, 금성·홍천이 2리, 피일·구부랑·수일이 3리, 앞산대·뒷산대·행촌이 4리, 석정·중말·화전이 5리를 이루고 있고, 6~10리는 아파트단지이다. 안강-현곡 간 도로개통으로 경주-안강 간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산대는 경주시청에서 20km 25분 거리다. 산대1리는 전체 250가구 가운데 농가가 60가구이다. 산대2리는 200가구 중에 농가 70가구, 산대3리는 700가구 중 농가 60가구, 산대4리는 900가구 중에 농가 300가구, 산대5리는 1000세대가 넘고 농가는 370가구, 산대6리는 푸른마을, 협성, 대경 등 600세대에 농가가 200가구, 산대7리는 우방아파트 864세대와 우방상가 30여 가구, 산대8리는 에덴아파트 996세대, 산대9리는 한동아파트 990세대, 산대10리는 삼도아파트 450세대 등이다. 산대는 주로 벼농사를 짓고, 그외에 토마토, 감나무, 한우(500두), 젖소(500두) 등을 기르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104살의 지만수 할머니로 홍천에 살고 있다. 아직 눈과 귀가 총명하고 허리도 굽지 않은 채 꼿꼿하게 산책을 다니신다. 사진촬영을 요구한는 기자에게 늙어서 흉하다고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뿌리치고 도망가시는 수줍은 모습이 아직 젊은 아낙 같았다. 이 마을에는 청한이씨, 영천이씨, 안동권씨, 남양홍씨, 월성최씨 등 5개 성씨가 100여년 전에 계중을 모아 사이좋게 지내왔는데, 지금도 그 후손들이 계중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산대 12마을 안강 인구 3분의 2 앞산대 산대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마을이라 ‘앞마을’이라고도 한다. (60가구) 행촌(杏村) 예로부터 은행나무가 많아 ‘행촌(杏村)’, ‘행촌동(杏村洞)’이라고도 한다. 영천이씨가 많았으나 지금은 각 성이 다 산다. (50가구) 동제 이 마을은 20년 전까지는 동제를 지내다가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당목 마을 가운데 수령 600여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원줄기는 늙어 거의 고사한 상태고 그 뿌리에서 다섯 줄기가 올라와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이 은행나무가 당목이지만 사유지에 편입되어 있어 관리가 어렵고 그래서 마을이 잘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주민들은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해 보호하기를 바라고 있다. 뒷산대 산대의 뒤에 있는 마을이라 ‘뒷마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표충각’이 있다. 청한이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30가구 정도 산다. (50가구) 새터 구불안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태’, ‘신기(新基)’라고 했다. 안동권씨, 남양홍씨, 청한이씨 등 3성이 많이 산다. (50가구) 빔의골 마을 앞산이 범의 형국이고 범의 꼬리에 해당하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범의골’, ‘호계동(虎溪洞)’, ‘호미’라고도 한다. 골짜기 안에 범굴이 있다고 한다. 어래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금성(金城) 병자호란 때 충청도에서 피난 온 금성공(金城公) 이지(李地)의 묘가 있었다고 하여 ‘금성(金城)’, ‘김생’, ‘김신이’라고 불렀다. 옛날 청한이씨 집성촌으로 새터 동쪽에 있다. (30가구) 홍천(洪川) 산대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운데로 큰 내(川)가 흘러 ‘홍천(洪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래산물이 본래 이곳으로 흘러 넓은도랑이 있었는데 일제 때 제방을 막고 물길을 구불안(지금은 구획정리하면서 지하로)으로 돌려 도랑이 없어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물길을 돌린 이후부터 산대가 망했다고 한다. 도랑은 없어졌지만 당시 심었던 개울가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서 있다. (50가구) 동제 해마다 음력 3월 3일 해뜨기 전에 동제를 지낸다. 당목 동회관 동남쪽에 있는 약 120년 된 느티나무이다. 1982년에 마을보호수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최근 나무 주변의 콘크리트포장을 걷어내고 자연석으로 정비를 했다. 피난 중에 피로 연명 피일(避日)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했으며, 피난 중에 식량이 부족해서 피를 먹고 연명하였다고 하여 ‘피일(避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직산’이라고도 한다. (20가구) 구불안 피일 앞 들에 물을 대는 보가 멀리까지 구불구불하게 있다 해 ‘구부랑’, ‘구불안’이라고 부르며 ‘윤원동(輪院洞)’이라고도 한다. 우방아파트 남쪽 풍산금속 맞은편 마을이다. (30가구) 수일(水一, 水日) 구불안 남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안강에서 물이 가장 맑아 수일(水一)이라 불렸다. 풍산금속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모두 구불안으로 이주했다. 석정(石井) 이 마을에 먹으면 힘이 세지는 장군수라는 큰 돌우물이 있었으므로 ‘석정’이라 했다고 한다. 또 광석정(廣石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므로 ‘광석정’이라고 부르다가 석정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장군수를 먹고 힘센 장사들이 많이 태어나자 역적이 될까 우려한 마을사람들이 의논해 우물을 메웠더니 그 뒤로 장사가 나오지 않고 태평했다고 한다. 산대 동북쪽에 있다. (35가구) 중말 마을이 넓은 들판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중리(中里)’, ‘중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대 동쪽에 있다. (30가구) 화전동(花田洞) 목화밭이 많아 가을이 되면 눈송이처럼 흰 목화가 만개하였으므로 ‘화전동(花田洞)’, ‘화지미’, ‘화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행촌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800세대) 임란창의 문천회맹 가담 덕산서사(德山書社) 청안인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를 추모하고 향사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24년에 피일에 세운 사당이다. 공은 조선 명종 14년(1559년) 이곳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문천회맹·경주성복성전 등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선조 27년(1594) 무과에 급제,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의 복병장으로 울산의 서생포전투에 나아가 싸우다가 1596년 38세에 순절해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호계서사(虎溪書社) 안동인 매와(梅窩) 권사악을 추모해 세운 사당으로 고종 때 금령으로 헐렸던 것을 2001년에 후손들이 그 자리에 새로 복원했다. 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등과 문천(汶川)에서 회맹하고, 손시(孫時), 최진립(崔震立)과 함께 영천으로 진격, 의병대장 최응수(崔應銖)와 합세해 성을 탈환했다. 사천현감(泗川縣監),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지냈다. 이곳에 침류정(沈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철종 10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됐다. 산대 367번지에 있다. 호동재사(虎洞齋舍) 청안인 영사재(永思齋) 이선도(李善道)를 추모해 그 후손들이 빔의골 안 골짜기에 지은 재사이다. 강구정(康衢亭) 청안인 정와(靜窩) 이운현(李運賢)을 추모해 후손들이 70여년전 뒷산대에 세운 정자다. 산대리 792번지에 있다. 서생포전투에서 38세에 순절 표충각(表忠閣) 임진왜란 때 순절한 청안인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세운 정려각이다. 정려기는 이조참판 홍양호(洪良浩)와 김상집(金尙集), 비문은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찬했다. 뒷산대 마을 서쪽 들 가운데 있다. 삼우정(三友亭) 영천인 헌납(獻納) 이안유(李安柔)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행촌에 있다. 약 80여년전에 지은 이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상모정(尙慕亭) 청안인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을 추모해 후손들이 피일골 어귀에 세운 정자다. 구암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조선 고종 30년(1893) 성균관제주에 추증되었다. 본래 직산서사였는데 불타고 새로 지어면서 상모정으로 고쳐 불렀다. 4칸 2칸에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서림정(西林亭) 청안인 덕와(德窩) 이주빈(李周彬)을 추모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정자 앞에 50여 평의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연못이 없어지고 그 흔적만 있다. 뒷산대 서쪽, 칠평천과 28번 국도사이에 있다. 3칸 2칸에 양쪽 방, 가운데 마루를 배치했으며 원기둥, 팔작지붕이다. 수졸재(守拙齋) 청안인 수졸 이두경(李斗經)을 추모해 후손들이 100여년전 뒷산대에 세웠다. 산대리 792번지에 있다. 어은정(漁隱亭) 청안인 이이초(李彛初)를 추모해 그 후손들이 1970년에 산대리 394번지 새터 마을 가운데에 세운 정자다. 3칸 팔작지붕에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죽오정(竹塢亭) 청안인 죽오(竹塢) 이양초(李養初)를 추모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 본래 풍산금속에 있던 것을 1973년 구불안 마을 어귀로 옮겼다. 신라시대 미륵석불좌상 미륵석불상(彌勒石佛像) 신라 아달라왕 때 공수자(公輸子)가 조각했다고 전하는 높이 70cm의 좌불이다. 산대리 산 97번지 호계서사 서편 산기슭에 있다. 이 불상은 기도효험이 있다고 한다. 어래산 안강의 북쪽에 솟아 있는 높이 593m의 산으로 무릉산, 자옥산, 도덕산과 함께 안강읍의 주산이다. 조선시대 대학자 회재선생의 옥산서원과 독락당, 신라 흥덕왕릉, 창녕 조씨 종덕제, 구상서원 등이 이 산기슭에 있다. 바람삐알 바람이 매우 심하게 부는 산으로 덕산서사의 북쪽에 있다. 새미기삐알 바람삐알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꾀뜨뱅이꼭디기 진등재 서쪽에 있는 산마루로 ‘꾀뜨뱅이만디이’라고도 한다. 풍산금속에 편입됐다. 홍두깨처럼 생긴 등성이 용딩이 피일의 동쪽에 용처럼 생긴 등성이다. 홍두깨등 홍두깨처럼 생긴 등성이로 바람삐알 북쪽에 있다. 홍장군 밋등 홍두깨등 서쪽에 홍장군 묘가 있는 등성이다. 진등 수일의 서남쪽에 있는 긴 등성이로 풍산금속에 편입되었다. 방아등 빔의골 북쪽의 디딜방아처럼 생긴 등성이다. 제비너덜 피일 안 골짜기에 제비처럼 돌무더기가 덮인 비탈이다. 진등재 산대리에서 두류리로 넘어가는 진등 위의 고개다. 풍산금속에 편입되었다. 내래재 피일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기계재 빔의골에서 기계로 넘어가는 고개로 솥두껑처럼 생겨 ‘소두방재’라고도 한다. 갓골 안첨지 팔밭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풍산금속 입구 서쪽에 있다. 내래 피일 서북쪽 골짜기로 매봉재 아래에 있다. 덕골 용딩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빔의골 서편에 있다. 이여송이 장수 날 명당 혈맥 잘라 도마골 임진왜란 때 원정 온 명나라 이여송이 이곳 산의 형세가 장수가 태어날 명당이라 혈맥을 잘랐는데, 지금도 큰 칼로 자른 듯 흔적이 있어 ‘도마골’이라 한다. 새터 서쪽 산대못(도마골못)이 있는 일대의 골짜기이다. 칼로 자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버밋골 지형이 범의 꼬리처럼 생긴 골짜기로 ‘호미골’이라고도 한다. 새터 북쪽에 있다. 불미기골 불미기(풀)가 많았던 골짜기로 채방골의 서쪽에 있다. 지금은 풍산금속에 편입됐다. 새못안 덕산서사 서쪽 골짜기로 새로 판 못 안쪽에 있다. 안첨지 팔밭골 안첨지의 팔밭(火田)이 있었던 골짜기로 웃수일 서쪽에 있다. 풍산금속에 편입됐다. 약물골 약물이 나던 골짜기로, 아릿수일 남쪽에 있다. 풍산금속에 편입됐다. 주검을 보관하고 염을 했던 초빈 어래산골 어래산 남쪽 골짜기로 새터 북쪽에 있다. 덕산서원 뒷골짜기의 어래산 정상부에 있다. 채방골 주검을 보관하고 염을 했던 채봉(초빈;草殯) 골짜기로 갓골의 서쪽에 있다. 풍산금속에 편입됐다. 행산골 피일의 북쪽 골짜기로 현재 포사격장 있는 곳이다. 백장골 백정승이 살았다는 골짜기로 새터 동쪽에 있다. 산수골 백장골 북쪽에 있다. 현재 산수골농장이 있는 자리이다. 갈밭들 피일의 남쪽에 있는 들로 물이 많고 갈대가 많았다. 꽃밭새미 꽃밭새미가 있는 논으로 산대 서북쪽에 있다. 나방들 산대와 양월 경계지역에 있는 들이다. 도마골들 도마골에 있는 들로 지금 안강공설운동장이 들어서고 들은 일부만 남았다. 동삿들 행촌 북쪽에 동사가 있었던 곳의 들이다. 두통골 중말 서북쪽 두통골에 있는 들이다. 멍에배미 지형이 멍에처럼 생긴 논으로 행촌의 북쪽에 있다. 지금은 경지정리하고 없어졌다. 칠평천 물막이 제방 ‘방축’ 방축(防築) 칠평천의 물을 막기 위한 제방이 있는 논으로 산대의 서쪽에 있다. 서림정이 있는 곳이다. 백정골 백 정승의 소유였다고 하는 들로 새터 동쪽에 있다. 서북들 산대에서 제일 큰 들로 금성과 석정사이에 있다. 섬배기 논 가운데 돌무더기가 섬처럼 쌓여 있는 곳으로 멍에배미 서북쪽에 있다. 진배미 황새배미 위에 있는 긴 논으로 경지정리하면서 없어졌다. 황새골 피일의 동쪽에 있는 들이다. 황새배미 지형이 황새 모양으로 생긴 논으로 행촌 서쪽에 있다. 도마골못 1961년에 막은 도마골에 있는 못, ‘산대못’이라고도 한다. 피일못 일제시대에 막은 피일의 못, 덕산서사 남서쪽에 있다. 바끝못 덕산서사의 바깥쪽에 있는 일제시대에 막은 못이다. 백정골못 백정골에 있는 못으로 일제시대에 막았다. 안못 덕산서사의 안쪽에 있는 못. 안정이못 안정이라는 일본사람이 소유했던 못. 도마골 서북쪽에 있다. 칠평천에 콘크리트관 묻어 취수 도마골보 도마골 못에 물을 대는 보로 이여송이 혈을 자랐다는 곳으로 보를 막았다. 윤원보(輪院洑) 구불안 마을 앞에 있는 보다. 황공사보 일제 때 칠평천을 막아 콘크리트관을 묻어서 구멍을 뚫어 취수한 물을 흘려보낸 보다. 화지미 서쪽에 있다. 말바우 새터 남쪽 냇가에 있는 말(斗)처럼 생긴 바위다. ‘두암(斗岩)’이라고도 한다. 우방아파트 지을 때 깨어버리고 없어졌다. 맷돌바우 어래산 남쪽기슭 피일 바람비알 안쪽에 맷돌처럼 생긴 바위다. 선바위 피일 뒷산에 10m 높이로 서 있는 큰 바위다. 피일골짜기에 있다. 쉰질바우 높이가 쉰질이나 되는 높은 바위. 어래산 정상부에 있다. 꽃밭새미 홍천 동남쪽 꽃밭새미 논에 있는 큰 샘. 지금도 물이 새긴다. 향림사(香林寺) 1906년경 김노승이란 이가 절을 지을 때 주위에 향나무가 많아 향림사(주지 법명)라 했다고 한다. 안강리에 있었는데 10여년전에 길이 나면서 중말로 옮겼다. 우방아파트와 28번국도 잇는 도로개설 주민들은 산대가 안강읍의 중심이고 인구는 많지만 지역 발전은 아주 느려 가장 후진 마을이라고 불만이다. 우방아파트에서 홍천을 거쳐 산대4리 28번 국도까지 2차선 도로개설이 제일 시급하다. 안강여중학생들도 이 길을 많이 이용하는데 차량이 교행이 안 되고 매우 불편하다. 도로를 빨리 개설해 신도시와 구도시를 연결해야한다는 바람이다. 이 마을출신으로는 이용정(88 안강여중고 설립자), 이진기(77 대구 전 학교장), 이장식(71 대구 전 학교장), 이정락(70 서울 변호사), 김기찬(70 전 경북대 교수), 이정문(68 영동제약 대표), 이혁수(45 서울시 서부도로안전관리사업소 과장)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이용락 노인회 총무님을 비롯한 각 이장과 마을 관계자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이남미 간사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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