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애(南厓) 이두원(李斗遠, 1721~1782)은 영해에서 갈암 이현일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우암 남구명의 손녀와 혼인한 뒤 처향(妻鄕)인 외동읍 영지에 와서 살았다. 우암은 제주통판과 순천부사를 역임하고 영지에 은거하며 영지서당을 개설했다. 이곳에는 남용만 등 많은 선비들이 공부하며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애 역시 이들과 더불어 경전과 역사책을 논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더욱이 그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문밖으로 함부로 나다니지 않으니, 이웃 사람도 그의 얼굴을 보는 이가 드물었다. 어쩌다가 마을 사람들이 그를 대하면 ‘이불자(李佛子)’라고 일컫고, “더럽지 않은 깨끗한 논을 마련해 별도 벼를 심어 이불자의 양식을 삼도록 하자”라고 했는데, 이는 남애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 데서 나온 말이다. 기사년(1749)에 아내 남씨를 잃은 그는 영지에 살고 싶지 않았다. 경주 서쪽 건천 부양리(傅陽里)로 옮기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부양리는 지금의 송선리로, 재녕 이씨로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것이다. 의지할 데 없이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남애의 모습은 초췌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사람과 같이 과거에 응하여 두 번 향시에 합격했으나 복시에서 떨어졌다. 그는 사리와 분수를 분명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식으로서 정성을 다하지 못함을 못내 마음 아프게 여기고, 여러 형제와 단란히 모여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백형을 비롯하여 형들이 먼저 죽으니,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으로 내려와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남애는 한사(寒士)로 일생을 보냈고 노경에 이르러 더욱 고적했으나 명가의 후손으로서 꿋꿋한 선비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 특히 그는 시문에 매우 뛰어났다. 무술년(1778)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부윤 김상집(金尙集)은 주민을 위해 창고를 열어 적극 구휼하고, 그 일을 마친 후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인근 고을에서 백여 명이 참석해 진연시(賑宴詩)를 지어 축하했는데, 남애가 그 시의 서문으로 지은 글이 ‘남애선생문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글 가운데 주사암을 유람하고 남긴 유주사암기(遊朱砂庵記)와 신라 유적을 두루 답사보고 지은 동도십경(東都十景) 등이 있다. 남애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을 잠그고 앉아 학문에 힘쓰고 후진 양성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마을 제자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능력에 따라 순순히 가르치니, 학문을 진작하는 효과가 자못 컸다. 송선리 작은 마을에서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는 점차 널리 펴졌다. 어쩌면 건천 일대에서 최초로 독서인이 있어서 독서하는 사람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죽은 2년이 지난 갑진년(1784)에 학계(學契)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남애의 제자이며 문과에 급제한 덕봉 이진택과 정동후 및 정주언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26년 후 기사년(1809)에 그가 살았던 선계(仙溪)가 복두산 아래 남애서사를 건립하니 강당은 다섯 칸이고 포사는 세 칸이었다. 무인년(1818)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얼마의 재산을 모아 학계 자금을 증가시켰다. 기묘년(1879)에 영천 군수 이학래(李鶴來)가 기문을 지어 그 내력을 자세히 밝혔다. 이후 여러 번 보수는 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송선리에서 산성 골짜기를 들어서다보면 입구에 성암사를 만난다. 여기에서 왼쪽 산기슭을 타고 복두암쪽 산길로 조금 올라가다가 오른쪽 대나무 숲이 우거진 속에 무너져 가는 남애서사가 있다. 건물 절반은 이미 내려앉아 앙상한 서까래와 굵은 기둥을 드러내고 있으며 낮인데도 박쥐 떼가 날아다닌다. 나머지 부분도 무너지기 직전에 놓여 있다. 근 3백년 이래 건천 일대의 최대 교육장을 이렇게 방치할 수 있는가? 주위의 무관심 속에 포탄 맞은 가옥처럼 처참한 모습만 남아있다. 본 건물이 창건된 지 2백년이 지났고, 또 이 지역 유일의 강학(講學)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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