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동 취재하던 지난 19일 아침 수은주는 영하로 뚝 떨어졌다. 가을 보내기 못내 아쉬워 가지 부여잡은 채 노랗게 물든 가로의 은행잎,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에 화들짝 놀란 듯 낙엽으로 뒹굴었다.
경주남산기슭 상서장 오르는 길, 잎 진 산수유 빨간 열매 조롱조롱 매달린 채 한껏 움츠리고 떨고 있었다.
경주남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한 인왕은 신라천년사직의 중심이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월성과 안압지, 첨성대, 석빙고, 국립경주박물관, 일정교 등 주요 유적들이 밀집해 있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이다. 최근 월성, 안압지, 첨성대 일대의 야간조명과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조성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아름다운 꽃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경주관광 1번지이다.
신라천년사직의 중심 경주관광 1번지
인왕동은 월성을 중심으로 그 남쪽과 북쪽으로 크게 구분된다. 남쪽은 문천(汶川)거랑과 남산기슭에 펼쳐진 ‘양지마을’, ‘해맞이마을’, ‘서당마을’, ‘반달마을’이 넓은 들을 끼고 있는 농촌마을이고, 북쪽은 선덕여고 서편의 ‘새터’와 첨성대 북편의 ‘비두거리’가 도시형 집단주거지역을 이루며 주로 직장인들이 많고 농가는 거의 없다.
인왕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왕, 새터, 월성, 비두거리, 양지마을, 음지마을(지금의 해맞이마을), 반달마을, 서당마을, 쪽샘 일부를 병합하면서 인왕사(仁旺寺)의 절 이름을 따서 ‘인왕’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인용사(仁容寺)의 인(仁)자와 왕정(王正)골이라는 왕(王)자를 따서 ‘인왕(仁王)’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왕동은 경주시 월성동의 8개 법정동 가운데 하나로 양지마을, 해맞이마을, 반달마을, 서당마을이 1통(121세대 274명), 새터가 2통(157세대 341명), 3통(82세대 182명), 8통(132세대 267명), 비두걸이 4통(197세대 399명), 5통(190세대 377명)을 이루고 있다. 1통은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 농가이고, 나머지 통은 일부 상가와 대부분 직장인이다.
음지마을 → 해맞이마을로 고쳐
양지마을 비석거리 서쪽의 문천가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로 향토사학가 고청 윤경렬 선생으로 인해 유명했던 마을이다.
해맞이마을 양지마을 남쪽 문천거랑 건너 산기슭 음달에 있는 마을이라 ‘음지마을’이라고 했으나 이 마을에 살았던 한글운동가 최햇빛 선생이 ‘해맞이마을’로 고쳤다.
서당마을 신라시대 학자 고운 최치원(崔致遠)선생의 상서장(上書莊)이 있어 ‘서원각단’, ‘서원마을’, ‘서원리(書院里)’, ‘서당(書堂)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동제 서당마을과 해맞이마을사이에 있는 바위에서 10여년전까지 동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3년전에 그 바위도 깨버렸다고 한다.
반달마을 국립경주박물관의 서편 문천가에 있는 마을이라 ‘문천마을’이라 불렀으나 최근 ‘반달마을’로 고쳤다. 인왕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랫인왕’, ‘하인왕’ 이라고도 한다.
새터 첨성대 북쪽 기찻길 가에 새로 생긴 마을로 ‘새터’, ‘새태’, ‘신기’라고도 한다. 선덕여고 주변 마을이다.
동제 신라국악원 서편 고분에 오랜 꾀양나무(고욤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동제를 지냈으나 20여년전에 이 나무를 베어내고 지금은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비두걸 첨성대 일대에 이루어진 마을로 옛날에는 첨성대를 비두(比斗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한다는 뜻)라고 했으며 이 일대를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라고도 했다고 한다.
월성마을 월성 일대에 이루어진 마을로 월성 안에는 석씨집성촌으로 숭신전을 포함해 7가구정도가 살았고, 안압지 부근에 2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없다.
동제 비두걸과 월성마을은 월성 북쪽 석빙고 동편에 있는 참나무에 동제를 지냈으나 30여년전 월성마을이 철거되면서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월성 조선시대부터 반월성
월성(月城)터 초승달모양이므로 ‘신월성(新月城)’, 왕이 있다고 ‘재성(在城)’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렀다. 제5대 파사왕 22년(101) 흙과 돌을 섞어 둘레 3023자의 성을 쌓았고, 임금이 옮겨왔다고 한다.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확장됐다. 동서 900m, 남북 260m로 동·서·북면은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이용해 거의 쌓지 않았다.
귀정문(歸正門)·북문(北門)·인화문(仁化門)·현덕문(玄德門)·무평문(武平門)·준례문(遵禮門) 등의 문과 월상루(月上樓)·망덕루(望德樓)·명학루(鳴鶴樓)·고루(鼓樓)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신하들과 외국 사신의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삼궁(三宮)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안압지(雁鴨池) 월성 동북쪽에 있는 둘레 약 1285m의 못으로 신라 제30대 문무왕 14년(674)에 만들었다고 한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붙여졌고 본래는 월지(月池;달못)였다. 삼국을 통일 후 이곳에 못을 파고, 중국의 무산(巫山) 12봉을 본 따서 못 동쪽에 산을 만들고, 못 안에 삼신산을 본떠 3개의 섬을 만들어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기르며 화초를 심어 꾸미었다고 전한다. 1975년부터 2년간 발굴하고 일부 복원해 야간조명을 밝혀 야간관광객 유치에 한몫하고 있다.
별을 관측하던 천문대
첨성대(瞻星臺)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6년(645)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관측대다. 네모난 기단 위에 직사각형 화강석을 호리병 모양으로 쌓았다. 남쪽 중앙 12단과 16단 사이에 구멍을 냈다. 제일 윗부분에는 긴 돌을 2층으로 짜서 ‘정(井)’자 모양으로 올려놓은 것으로 미루어, 그 위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양에 남아 있는 천문대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전한다. 국보 제31호다.
부처골 석불좌상(石佛座像) 경주남산 동쪽기슭 부처골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자연석을 파내고 그 속에 불상을 조성해 ‘감실불상’이라고도 한다. 높이 3.2m, 너비 4.5m되는 큰 바위의 남쪽면을 파서 감실처럼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통일신라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채색을 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보물 제 198호로 지정되었다.
석빙고(石氷庫) 월성 안에 있는 얼음 창고로 길이 약 19m, 너비 약 6m, 높이 5.45m의 석실이다. 반원형의 천정은 홍예를 틀고 위에는 흙을 덮고 3곳에 환기구멍, 바닥은 홈을 경사지게 파서 물이 흐르도록 했다. 조선 영조 14년(1738)에 세운 것을, 3년 뒤(1741) 8월에 부윤 조명겸(趙明謙)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신라 제 14대 유례왕 때와 제22대 지증왕 6년(505) 11월 왕명으로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보물 제66호다.
일정교(日精橋) 월정교와 함께 남천에 있는 신라시대의 다리로 ‘춘양교(春陽橋)’, `칠성교`, `효불효교(孝不孝橋)`, `칠자교(七子橋)`, `쑥기떡어미다리`라고도 한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에 놓았다고 하는데, 2002년 발굴조사 결과 길이 55m, 상판 넓이 12m, 교량 높이 5m 이상으로 이루어진 누교(樓橋)로 추정된다.
이 다리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때 쑥기떡(수수떡)장수를 하는 한 홀어머니가 아들 7형제를 데리고 살았는데 밤마다 남천을 건너 사내를 만나고 새벽이면 돌아왔다. 이를 안 7형제가 캄캄한 밤에 찬 물을 건너다니는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어머니에게는 효도지만 죽은 아버지에게는 불효라 하여 ‘효불효교(孝不孝橋)’라 불렀다고 한다. 박물관 서쪽 반달마을에 다리의 윤곽이 남아있다.
어머니에 효도 아버지에 불효
상서장(上書莊) 신라 말기 학자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고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올렸던 곳이다. 경주남산 기슭에 있는 상서장에는 고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다.
선생은 신라 헌안왕 때 태어나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고국에 돌아와서 나라를 바로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냈다. ‘계원필경’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효자이씨정효각(孝子李氏旌孝閣) 효자 이승증(李承曾)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효각으로 첨성대 북편에 있다. 정효각 북쪽에는 공의 임란창의비가 있다. 공은 여덟 살에 모친상을 당하고 3년간 시묘살이하며 하루도 호곡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효행에 감동해 호랑이와 도적도 이곳을 비켜 갔다고 한다.
지금의 충효동(忠孝洞)은 공의 시묘하던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의 나이에 의병들에게 격문을 돌리며 적과 싸웠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일컬어 관란선생(觀瀾先生)이라고 부른다. 정효각 옆에 남쪽에 문호사(汶湖社)를 지어 제향하고 있다.
도두랑산 경주남산 북쪽자락으로 인왕동과 교동, 탑동의 경계에 있는 높이 95m의 자그마한 봉우리다. 신라 때 임금이 바뀌면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도당산(都堂山)’이라고도 한다. 경주-포항 산업도로 닦을 때 맥을 끊는다고 박씨 문중에서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는데 “다른 조상들도 묘를 파고 공사하는데 우리조상만 보호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부처골 경주남산 동쪽기슭 감실불상이 있는 골짜기로 ‘불곡(佛谷)’이라고도 한다.
왕정(王井)골 인왕동과 교동, 탑동에 걸쳐 있는 골짜기로 왕 장군 혹은 왕 정승의 무덤이라는 큰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굴되고 없다.
술랫골 왕정골 동남쪽 남산성 안에 있는 골짜기로 순라군이 지나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도당산토성(都堂山土城)터 도당산에 있는 신라 때 토성으로 무너지고 동남쪽에 약 50m 남아 있다. 문터 5개소와 건물터 2개소가 있는데 신라시대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다.
동정(東亭)터 고려 공민왕 때 문신 전록생(田祿生)이 ‘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를 지어 읊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초석이 남아 있다. 해맞이마을에 있다.
부러진 돌 옮기지 말고
비석거리 산업도로 남쪽 양지마을 동편에 울산으로 통하는 옛 관행길 옆에 선정비들이 많이 서 있는 곳이다. ‘비석걸’이라고도 한다.
인용사(仁容寺)터 문천 남쪽 일정교 서쪽에 있던 인용사 터로 인왕사라고도 한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하고 있다.
천주사(天柱寺)터 천주사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세웠다고 전한다. 이 절은 키가 11자에 힘이 장사였던 진평왕이 법당으로 오르는데 돌계단 3개가 한꺼번에 부러지자 진평왕이 “부러진 돌을 옮기지 말고 후세 사람에게 보이라”고 했으므로 그 돌을 부동석(不動石)이라 부르고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천주거랑 안압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천주사 터를 지나 계림 옆으로 해서 남천으로 들어가는 도랑이다. ‘삼국유사’에 알영부인이 태어날 때 입에 닭부리 같은 게 달려 있었는데, 이 거랑에 와서 씻으니까 없어졌으므로 그 후로 거랑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고 한다. 또 소지왕 때 천주사 중이 궁주와 짜고 왕을 해하려고 한 사건도 기록하고 있다.
왕정골 샘 터 왕정골에 있던 샘으로 왕정(王井)이라고도 한다.
갓들 부처골의 서쪽에 있는 들로 ‘입평(笠坪)’이라고도 한다.
동정(東亭)지 비석거리 남쪽 남천 건너에 있는 들로 동정(東亭)이 있었으므로 ‘동정’이라고 한다. 해맞이마을 앞들이다.
양정들 월성 북쪽에 있는 들로 ‘양지들’, ‘양정평’이라고도 한다. 선덕여고 동편들이다.
옥곡(獄谷) 월성 동남쪽에 있는 들로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이 들어선 들이다. 일정교 동쪽에 큰 웅덩이가 신라 때 월성을 쌓으면서 흙을 파 생긴 구덩이라는데, 마치 감옥처럼 생겼다고 한다. 이곳에 밤마다 귀신들이 나와 떠들어 잠을 잘 수 없었는데 마을사람들이 탈을 쓰고 북과 종을 치며 밤새도록 뛰었더니, 그 후로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옥골’, ‘옥달’, ‘인왕리구덩이’, ‘옥다리’라고도 한다.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 경주시 인왕동 76번지에 있는 박물관으로 에밀레종을 비롯한 각종 경주지역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현 경주문화원 자리에 있던 것을 1975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철거지역 우범지대로 전락
이 마을은 신라 때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주요유적들이 밀집한 탓에 많은 주민들이 문화재정비사업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꾸준히 철거가 진행되고 있어 동세가 갈수록 약해지는 마을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새터마을의 신라국악원 부근 고분주변의 철거된 지역이 우범지대로 전락해 대책이 요구된다고 했다. 특히 야간에 남녀 청소년들이 모여 난잡하게 놀고 싸우기도 해 주민들이 불안하고 불편하다고 했다. 조명등을 설치해 경관을 밝히고 순찰을 강화했으면 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두식(85 변호사), 윤정우(83 전 경북대 교수), 윤진우(81 전 서울시 도시건설국장), 정진석(77 경주시유도회장), 윤희우(73 전 한전부사장), 차동주(73 전 경주시의원), 윤덕우(71 전 동양그룹 부회장), 한석기(70 전 신라고등학교 교장), 윤태우(69 전 현대건설 전무), 윤영우(67 전 현대상선 부사장), 윤양우(67 서울 유림물산 대표), 윤광주(65 미술가), 김점호(55 현대건설 이사), 김용호(53 영산대 교수), 윤소희(53 동국대 교수) 등이 있다.
인왕동 취재에 협조해주신 박광호 월성동장을 비롯한 권용욱(월성동 주민생활지원담당), 김문섭(82 인왕 781), 양종택(79 경주시유도회 월성동 지회장), 박종근(51 8통 통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