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자중학교 교정 나무숲 사이를 보면 건물 계단석 등으로 활용되었던 크고 작은 석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있는데 전면에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고 쓰여 있다. 곧 이 자리가 집경전의 옛 터라는 말이다. 해서체로 쓰인 글씨는 전아한 풍격과 고의(古意)가 넘치는 필치이다. 세로로 쓰인 이 글씨 옆에 작은 전서체로 ‘어필(御筆)’이라는 두 자가 보인다. 어필이면 임금님의 글씨라는 말이다. 뒷면을 보면 ‘숭정기원후삼무오사월일립(崇禎紀元後三戊午四月日立)’이라 적어놓았다. 무오년은 1798년이니,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의 어필임을 알 수 있다.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비면과 서체에 아무런 손상이 없고 다만 이끼가 조금 덮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조대왕의 친필 비석이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일까?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그린 어진이 최초로 경주에 모신 것은 태조 7년(1398)이다. 그 후 세종 24년(1442)에 집경전(集慶殿)이라는 전호가 내리고 참봉 2명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임란이 일어나자 참봉 정사성과 홍여률이 어진을 봉안하고 안동과 영월을 거쳐 강릉으로 가서 객사 임영관 옆에 집경전을 지어두고 모셨다. 이른바 강릉 집경전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주 집경전은 병화로 잔해만 남겨두고 모두 불에 탔다. 인조 9년(1631) 3월에 강릉 집경전에 소속된 노비가 실화하여 어진과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숭정전 뜰에 나아가 3일 간 망곡(望哭)하고, 왕비 역시 3일 동안 소복과 소찬으로 지내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강릉부사 민응형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곤장 1백대를 때리고 2천리 밖으로 유배시켰다. 조선 시대 태조 어진이 지닌 상징성과 중요성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임란 중에 경주 부윤이 어진을 수호하지 못했다면 꼭 같은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집경전의 위상은 향교 대성전보다 더 신성시되었던 관민 최고의 성지(聖地)였다. 강릉 집경전이 소실된 후 경주 인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라에 글을 올려 경주에 집경전을 다시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고 이암(1641-1696)은 경주 사람을 대표해서 나라에 올린 주의표(奏議表)가 있다. 이 글에서, 전란 때 불타버린 집경전을 잡초 속에 방치시켜 둔 것은 나라의 잘못이다. 경주 사람들은 이를 몹시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으니, 하루 빨리 중건하여 제례 의식과 첨모(瞻慕)하는 장소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임인년(1662)에 남긴 도약소문서치부(都約所文書置付)라는 성책을 보면, 집경전 중건에 따른 전후 이관(移關) 문서를 모두 큰 궤짝에 넣어 봉해 두었다고 했다. 이에 관한 문서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정조 시대에 이르자 경주 인사들의 여론은 더욱 뒤끓었다. 방년에 문과 장원 급제한 질암 최벽(1762-1813)은 이에 대해 정조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마침내 무오년(1798) 4월에 정조는 집경전을 중건하여 태조 어진을 다시 봉안하지 않고,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내리며 그 자리에 비를 세우게 했다. 이때 경주 부윤 류강은 어명에 의해 비를 세우고 탁본한 것을 나라에 올리자, 정조는 그의 공을 치하하고 상을 내렸다. 서울대학교 내 규장각에 ‘집경전구기첩(集慶殿舊基帖)’이란 책자가 있다. 1798년에 만든 것으로, 규격은 가로 세로가 28×42cm이고 필사본 채색화이다. 이 책에는 비각과 주변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아울러 비각 규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비석 길이는 3척(尺) 8촌이고, 윗넓이는 1척 3촌 6푼이며, 아래 넓이 1척 3촌이고, 두께는 7촌 2푼이라고 적었다. 그밖에 비각과 하마비 및 홍살문 등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적어놓았다. 이 자료에 의해 비각을 다시 짓는다면 거의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기첩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하고 있는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와 같은 해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시대 경주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1939년에 이르러 주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이곳에 들어와 불장난을 치다가 실화하여 비각은 전소되고 외삼문은 허물어졌다. 이후 1945년에 경주공립실과중학교(경주여중 전신)가 설립됨으로써 집경전 부지는 대폭 축소되었고, 다시 1964년에 동편 교사가 증축되자 비각의 터는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비석을 비롯하여 많은 석재는 교정에 여기 저기 흩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 유일의 어필 비석이 비각도 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금석(今昔)의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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