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가지 길가에 늘어선 은행나무에 노랗게 곱게 물든 단풍이 가을의 깊이를 말한다. 북부동은 경주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심마을이다. 경주읍성의 북쪽부분에 해당하므로 ‘북부’, ‘북부리’라고 하였으며 본래는 경주읍성의 북문 안에 있는 마을이라 ‘북문안’, ‘북문거리’라고 불렀다. 경주읍성과 집경전터, 주전지, 계림초등학교, 경주여자중학교가 이곳에 있다. 북부동은 고려 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읍성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성곽 밖에 있던 해자를 따라 난 길이 마을의 경계이다. 서쪽은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도로, 남쪽은 동문과 서문을 연결한 도로가 마을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주읍성의 성내를 4등분하여 그 동북부에 위치한 셈이다. 동쪽은 황성로를 사이에 두고 성동동과 서쪽은 봉황로를 사이에 두고 서부동과 남쪽은 북성로를 사이에 두고 동부동과 북쪽은 성건동과 각각 인접하고 있다. 1973년 법정동인 북부, 동부, 서부동을 묶어 행정동인 성내동으로 운영하다가 1998년 행정동인 중앙동(노동동, 노서동)과 성내동(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을 다시 병합하여 중부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북부동은 중부동의 3~5통에 해당한다. 현재는 북부동은 300여 가구에 90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으며 영세민이 많고, 나이 많은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종기(94살 북부 149-1)할아버지와 조만여(94살 북부 181)할머니이다. 고려 때 쌓은 경주읍성 북문안 경주읍성의 북문인 공진루 부근 성안에 있는 마을로 ‘북문안’이라고 불렀다. ‘북문거리’, ‘북문걸’이라고도 한다. 한탕걸 한탕 부근에 있는 마을로 한탕거리라고도 한다. 지금의 경주여중 서편 왕림탕 부근이다. 경주읍성 고려 현종 3년(1012)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에 다시 지었다는 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에 부윤 김식이 중수하여 동·서·남·북문을 차례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4075척(1.2km), 높이 12척(3m), 80개의 우물을 갖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문은 4방에 4개로 남쪽은 징례문(徵禮門), 동쪽은 향일문(向日門), 서쪽은 망미문(望美門), 북쪽은 공진문(拱辰門)이었다. 공진문(拱辰門)터 경주읍성의 북문인 공진문의 터로 ‘공진루터’, ‘북문터’라고도 하며, 북부동 189의 2번지, 서부동·북부동과 성건동 경계에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32년 부윤 김식(金湜)이 읍성을 개축할 때에 중건하였다는데, 그 뒤 헐리고 없다. 주전지(鑄錢址)터 엽전을 주조한 주전지(鑄錢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주여자중학교 동편, 계림초등학교 남쪽 길가에 있다. 돌로 만든 터널 모양의 구조물이다. 천정의 덮개돌은 장대석으로 양 석축 벽 위에 걸쳐져 있다. 1986년 해체·복원 작업을 했으나 정확한 용도를 찾지 못했다. 집경전의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집경전구기비(集慶殿舊基碑) 집경전 터에 있는 비석으로 조선 제22대 정조(正祖)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앞면의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 5자와 ‘숭정기원 후삼 무오사월□일입(崇楨紀元後三 戊午四月□日立)’의 12자가 새겨져 있다. 무오(戊午)는 정조 22년(1798)이다. 경주여중 앞 정원에 있다. 신라시대 궁궐 터 집경전(集慶殿)터 조선 태종 때 창건하여 태조의 어용을 봉안했던 집경전이 있었던 터다. 집경전은 창건 당시 어용전이라 불리었고,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네 곳에 있었던 태조 어용전은 전부 소실되었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되었다. 이곳은 신라시대에 군신들이 모여 축하 행사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각간선생실기(角干先生實記;김유신 장군의 전기)』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이 대신들과 의논 끝에 김춘추(金春秋)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이곳에서 왕위에 올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이 되었으며, 무열왕 8년(661) 11월 탐라국(耽羅國) 임금 종동음률(終冬音律)이 여러나라 임금 및 일본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을 데리고 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영접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석과 층층대의 일부가 남아 있다. 층층대는 한 덩이의 바윗돌을 깎아 다듬어 만들었다. 북부동 회나무 경주여중 서쪽 담 안에 있는 수령 500여년의 회나무로 옛날에는 금줄을 치고 주민들의 해마다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일제 말엽 벼락을 맞았는데 신기하게도 다시 싹이 났고, 광복 직후에는 교정의 쓰레기를 태우다가 불이 나서 탔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나무둘레는 약 5m, 높이 15m로 밑둥치부분의 속이 비어 있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북부동 116-3번지에 있다. 비보수(裨補藪)터 한탕 가에 있었던 숲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지금은 경주여중과 집들이 들어섰다. 한탕 터 집경전 터 서쪽에 있던 큰 웅덩이로 읍성에서 나온 하수가 이곳에 모여 정수된 다음 읍성 둘레의 해자를 돌게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계림학교 북서쪽에 큰 웅덩이가 있었으며 지금도 이 지역은 비만 오면 침수지역이라고 한다. 모든 토지 정부가 수용하고 이주했으면 북부동은 예전에는 상당한 부자마을이었다. 그러나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 주택의 증개축이 제한되고, 마을 안길이 좁고 소방도로조차 확보되지 않아 화재가 발생할 경우 소방차가 들어오지 못한다. 주민들의 생활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경주시의 달동네 1번지로 전락했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차라리 정부가 토지를 모두 수용하고 이주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경주읍성의 발굴과 복원이 계획되어 있으니 어쩌면 이 마을이 모두 이주하고 이 자리에 경주읍성이 들어설 날도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주민들은 내년 초에 경주여중이 이전하면 도로를 내고 황성공원까지 다리를 놓아 관통해야한다고도 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용재(87 전 산림환경연구소 소장) 유효열(78 전 초등학교 교장), 김대윤(64 전 경주시의원), 정병욱(53 예비역 육군대령), 김정일(52 영남농업연구소 영덕출장소장), 정재영(50 육군중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최정임 중부동장을 비롯한 김봉재(77), 박형득(73), 오용화(63 3통장), 장순이(53 4통장), 정영애(57 5통장) 등 주민대표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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