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명물 ‘팔우정해장국’
신라왕궁 있던 ‘황촌(皇村)’ → ‘황오방(皇五坊)’ → ‘황오(皇吾)’
황오동은 예로부터 경주시의 중심이었다. 포항, 울산, 영천, 감포로 통하는 주요도로가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이며, 경주시의 중심상가를 이루는 상가밀집지역으로 주민 대다수(약 80%)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고, 농가는 140가구에 불과하다. 경주역과 경주우체국, 경주소방서, 한국농촌공사, 경주중·고등학교 등이 이곳에 있다.
경주의 대표 음식중 하나로 전국의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50년 전통의 팔우정 해장국을 비롯한 경주의 특산물 황남빵이 이 마을에 있고, 남고루터, 황오리고분군, 효자비, 팔우정 등의 유적을 간직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황오는 본래 신라왕궁이 있던 곳이라 ‘황촌(皇村)’이라고 불렀고, 읍내의 6방의 하나인 ‘황오방(皇五坊 동경잡기)’으로도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황오리(皇吾里)’로 바뀌었고, 1973년 시제실시에 의해 ‘황오동(皇吾洞)’으로 고쳐 불렀다.
쪽샘일대 가옥 대부분 철거
황오의 동쪽은 화랑초등학교 사거리와 경주소방서를 잇는 임해로를 따라 구황동에 닿아 있고, 남쪽은 명원한식당에서 쪽샘까지의 인왕, 황남동과 서쪽은 쪽샘입구에서 아카데미사거리, 신백사거리, 경주휴게소까지의 황성로를 경계로 노동동과 북은 화랑로를 경계로 성동동과 각각 인접해 있다.
황오동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부자마을이었으며 인구도 가장 많았었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에 묶여 건축행위가 제한되고, 경주시청사 이전과 탈 도시화 현상으로 인한 상권위축과 쪽샘지구와 황오리고분군일대의 가옥들이 철거되는 등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현재 18개통 84개반으로 2천389가구에서 5천534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제 황오시장 들어가는 입구 선창약국 자리에 느티나무가 당목으로 있었고 이곳에서 동제를 지냈는데 1961년 이 나무를 베고 건물이 들어선 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박석윤(94) 할아버지로 최근까지 혼자서 생활할 정도로 건강했는데, 혼자 살면서 식사를 자주 걸러 기력이 떨어져 지금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철도직원 관사 들어서 ‘관사’
관사 일제시대 때 철도직원 관사가 들어서면서 ‘관사’ 또는 ‘철도관사’라고 불렀다. 도로를 중심으로 남쪽은 ‘앞관사’, 그 북쪽은 ‘뒷관사’라고 한다. 이곳이 남고루의 옛 성터이므로 ‘성마을’, ‘묶은성’이라고도 했다.
성마을 남고루터 즉 오랜 묶은성터 근처에 있는 마을로 ‘묶은성’이라고도 한다. 일제시대에 철도관사가 들어서면서 ‘관사’, ‘철도관사’라고 한다.
장터 염매시장 부근에 있는 마을로 ‘새장터’라고도 한다. 명동의류공판장 부근이다.
반구정 옛 염매시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반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우체국 뒤쪽 일대이다.
효자마을 경주중·고등학교 위(동)쪽에 효자비가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황오동 1통이다. 경주고와 화랑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쪽샘 쪽샘이 있던 곳에 있는 마을로 황남동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황남동 쪽샘과 같이 있다. 황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쪽새미’, ‘쪽삼’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문화재정비사업으로 마을이 철거되고 없다.
고려시대 물막이용 토성
남고루(南古壘)터 대능원에서부터 동쪽으로 황오동 고분군을 둘러싸면서 다시 북쪽으로 북천에 이르는 방어용 토성이다.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지금은 대부분 파손되고 일부에만 흔적이 남아있다. 신라 고분군이나 월성과 연관성이 없고, ‘고려사’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1012년(고려 현종 때) 전라·충청·경상 3도의 군졸을 동원하여 북천에 석축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위치와 두께 등으로 미루어 읍성의 수재를 막기 위해 쌓은 제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3년 부분적인 조사를 통해 성벽의 기초 석축과 인공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확인되어, 고려시대 읍성의 외성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묵은성터’라고도 부른다. 사적 제17호로 지정했다.
남효자비(南孝子碑) 경주고등학교 동쪽 길가에 있는 효자비다. 앞면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문이 있다. 조선 태종 때 남득온(南得溫)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묘에 3년 동안 시묘한 효행을 기려 정려하고 세운 것이다.
모은정(慕隱亭)터 후진양성에 힘쓰던 조선 말엽의 경주인 최사환(崔思煥)의 공덕을 추모하여, 그의 손자 만도(晩度)가 세운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고도다방 뒤쪽이다.
경주의 3대 우물 ‘반구정’
반구정 샘 황오동 197번지 반구정 안에 있는 우물로 잘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아 동천동의 ‘백률사 샘’, 황남동의 ‘쪽샘’과 함께 경주의 3대 우물로 꼽혔다고 한다. 경주우체국 뒤쪽에 있다고 하나 주민들조차 알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다.
수봉이규인동상(秀峰李圭寅銅像) 경주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수봉 선생의 은덕을 기려 1948년 교정에 세운 동상이다. 뒷면의 글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지었다.
전몰학도병 추념비 6·25 한국전쟁 때 조국을 위해 산화한 당시 경주중학교 학도병을 추념하여 1954년 교정에 세웠는데, 1998년에 그 앞에 새로 비를 세웠다. 경주중학교에서 320명이 참전하여 포항·안강·기계 전투를 거치면서 그 중 47명이 전사했다. 옛날 비석은 뒤쪽에 있다.
황오리 고분군 황오리 일대에 산재한 48기의 무덤으로 통일신라 이전의 옛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이 일대는 건물을 대부분 철거하고 발굴이 한창이다.
황새무덤 중국의 사신이었던 황씨(皇氏)의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황오동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무덤이다. 선창약국 남쪽에 있던 작은 무덤을 황새무덤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해마다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황사무덤’이라고도 하며 황오동 325의 2번지에 있다.
최씨 8형제 우정 기려 ‘팔우정’
염매시장(廉賣市場)터 장터마을에 있던 상설시장으로 1954년에 개장되었는데, 1960년대에 경주역 앞으로 옮겨 성동시장(역전시장, 웃시장)이 되었다. 지금의 명동의류공판장 부근이다.
황오시장 1970년대에 새로 지은 팔우정 서쪽에 있는 황오동 시장이다. 지금은 거의 시장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팔우정(八友亭)터 팔우정은 본래 경주최씨 배반파 선대의 유허지에 있던 정자로 조선 말엽에 최국준(崔國俊)의 8형제가 이곳에서 함께 사이좋게 학업을 닦으니 정자이름을 ‘팔우정’이라고 했다.
이 정자는 1614년(광해 6년)에 창건, 1751년(영조 27년)에 모암공(慕庵公)이 중수하여 비석을 세웠다. 1899년(광무3년) 후손 정수(廷壽)가 개수하였으나 오랜 풍화로 무너지고 표지석만 남았다. 1960년 이곳에 로타리를 만들면서 표지석만 로타리 한 가운데 세워져 있다가 1993년 로타리를 철거하면서 남쪽 고분 옆에 옮겨 놓았다.
오리장배미 경주읍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논으로 옛날 아전들이 이곳까지 나와 새로 부임하는 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당시 벼슬아치나 과객들이 여근곡을 피해서 영천에서 시티재를 넘어 안강으로 돌아 이곳으로 다녔다고 한다. 정화제재소 위쪽의 양정로 도로일대이다.
황오동사무소에 행정기관 유치를
황오지하도를 1978년도에 건립했는데 비가 좀 많이 오면 침수되어 어려움이 많다. 1년에 2~3회, 30년 동안 70~80회 이상 침수되어 주민생활에 불편이 많다. 이의 정비가 시급하다.
문화재보호구역에 대한 무분별한 철거로 황오동의 상가침체와 철거지역이 우범지역으로 전락하고 있다. 주민들은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문화재정비사업을 추진했으면 한다.
또 황오동과 성동동이 합병해 마을 이름은 ‘황오동’으로 하고 사무소는 성동동사무소로 이전할 예정이다. 이럴 경우 황오동사무소 자리에 행정기관을 유치해 균형발전과 상가침체를 막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서동교(83 전 입실초등학교 교장), 김두준(76 전 시의원), 남강호(64 전 발굴조사단장), 최천식(62 전 천북면장), 서근수(62 전 시의원), 박광호(59 월성동장), 강우석(49 영화인), 이채관(49 국회정책위원)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 주신 정찬수(황오동 통장협의회장)과 김달문(황오경로당 회장), 한영훈(우성새마을금고 이사장) 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이남미 간사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