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명문가 교리 최 부잣집
신라국학 -고려향교 ‘교촌(校村)’ → ‘교리(校里)’
신라천년 숨결이 고스란히 스민 계림, 내물왕릉 앞 붉게 물든 산수유 따사로운 가을햇살에 상기된 얼굴로 설익은 단풍을 재촉하고 있다.
교동은 교리 최 부잣집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월성 서편에 자리한 이 마을은 ‘월성’과 ‘계림’, ‘내물왕릉’, ‘경주향교’, ‘사마소’, ‘월정교’, ‘천관사지’, ‘천원사지’ 등 경주의 중요 문화유적들이 밀집해 있다. 주변에는 첨성대, 대릉원, 오릉, 경주박물관, 안압지, 경주남산 등의 유적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일반적으로 ‘교리’라고 부른다. 신라3기8괴의 하나인 ‘문천도사’의 문천(지금의 남천)을 끼고, 그 북쪽의 ‘교촌(교리)’과 남쪽의 ‘천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천원은 다시 ‘천원’, ‘밭가분데’, ‘응달각단’으로 세분된다.
교촌정비사업으로 13가구 남아
교리는 월성동 6통으로 총 65가구에 12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나 그 가운데 51가구가 월정교와 교촌정비사업으로 철거되고 최 부잣집 고가와 골기 등 13가구만 남을 예정이다. 내년 봄까지 모두 철거할 예정으로 현재 약 50%정도 진행되고 있다. 교리는 주거지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하고 월정교와 교촌정비사업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천원은 월성동 7통에 해당하며 총 52가구에서 98명이 살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1농가만 1000여평에서 딸기 및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한우는 3가구에서 5두를 기르고 있다. 약 40%정도는 이사 온 주민들이고 마을의 20%정도는 비농가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천원마을의 김계향(96 사동댁) 할머니로 건강이 좋지 않아 바깥출입이 어렵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샘 있어 ‘천원’
교리(校里) 신라의 국학(國學)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 이후부터 향교(鄕校)로 이름이 바뀌자 마을이름을 ‘교촌(校村)’이라 부르다가, 1955년 시제 실시로 ‘교동(校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은 전국적으로 교동이라고 한다.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음력 정월보름날에 동제를 지낸다.
당목 계림의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 남쪽에 있는 느티나무로 나무 앞에 돌로 된 제단이 놓여 있다.
천원(泉源) 문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천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천원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절은 고려 귀부로 송도로 이주할 때 불에 탔다고 전한다. 지금도 당간지주와 주춧돌 등 돌이 남아 있으며 우물도 남아 있다.
동제 본래 이 마을에서 동제를 지냈으나 1965년에 동소유의 논을 팔아 전기를 넣고부터 교리와 합동으로 동제를 지낸다.
밭가분데 밭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천원 동북쪽에 있다.
응달각단 천원 동남쪽, 도당산 북쪽 응달에 있던 마을로 5~6가구가 살았으나 50여년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논이다.
김알지 탄강지 계림
계림(鷄林) 계림은 ‘시림(始林)’으로도 불린다. 신라 제4대 탈해왕이 시림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알아보라 했더니 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 열어 보니 옥동자가 있었다. 아이가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했으니 계림김씨(경주김씨) 시조이다. 왕명으로 숲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국호도 계림으로 삼았다. 사적 제1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계림김씨시조비각(鷄林金氏始祖裨閣) 계림 숲에 있는 계림김씨 시조 알지의 비각으로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웠는데 비문은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경주부윤 최헌중(崔獻重)이 썼다.
내물왕릉(奈勿王陵)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능으로 계림 서편에 있다. 내물왕은 364년 토함산 기슭에서 왜병을 무찔렀고, 373년 항복해 온 백제 유민 300여명을 받아들여 6부에 흩어져 살게 했다. 말갈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대륙의 문화를 받아 들였다.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문왕 때 세운 학교
경주향교(慶州鄕校)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설치한 국학(國學)이었던 곳으로 계림 서편에 있다. 고려 이후에는 향학(鄕學)으로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에 힘써왔다. 1492년(성종 23) 경주 부윤(府尹)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했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불에 타 위패를 도덕산 도덕암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대성전, 전사청(典祀廳)을 중건하고 위패를 다시 모셨다. 1604년 부윤 윤성이 동·서무를,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건했고, 1668(현종 9)년과 1979년에 보수했다.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전사청, 내신문 등이 남아 있는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중국의 5성(聖), 송조(宋朝) 6현(賢), 한국 18현을 제향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양식 건물이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됐다.
사마소(司馬所) 재매정 동쪽에 있는 사마소는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을 조직해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협의기구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모른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741년(영조 17)에 진사 이덕록, 손경걸, 유의건 등이 다시 짓고 ‘풍영정’이라 했다. 옆에 병촉헌(炳燭軒)은 1832년(순조 32) 생원 최기영이 세웠다.
‘사마소’라는 현판은 1762년(영조 38) 당시 부윤(府尹) 홍양한(洪良漢)이 썼고, 건물 안에는 중수기를 적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사마소는 설립 초기에는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했으나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해 문제가 생기자 1603년(선조 36)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폐지됐다.
원래 이 건물은 향교 남쪽 월정교 옆에 있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겼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자루 없는 도끼를 달라”
월정교(月精橋;月淨橋)터 월정교는 신라 경덕왕 19년(790)에 놓은 다리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설화로 유명하다. 신라 무열왕 때 원효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桐斧 我硏支天柱)”하고 노래하고 다녔다. 그 뜻을 알아차린 왕이 어느 날 월정교에서 뛰어내려 물에 빠진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그 후 요석공주가 설총을 낳았다. 최근 발굴하고,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재매정(財買井) 김유신 장군의 옛 집터에 있는 우물이다. 신라 선덕왕 13년(644) 김유신은 백제의 7성을 정벌하고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데, 백제의 대군이 매리포성(賣利浦城)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받았다. 말머리를 돌려 백제군을 물리치고 3월에 돌아왔는데, 또 백제군이 침범한다는 급보에 왕명을 받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마침 장군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있었으나 장군은 집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참 가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병사를 시켜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했다. 그 물을 마시고 “내 집의 물맛은 그대로구나” 하며 그대로 말을 몰았다. 이것을 본 부하들이 “장군이 저럴진대 어찌 우리들이 이별을 슬퍼하겠는가?” 하며 사기충천하여 전쟁에 크게 승리했다고 한다. 이 우물물을 계속 먹으면 장사가 된다고 한다.
신라 전성기에는 17만 8936호에 35채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김유신의 집이었다고 한다. 재매정은 금입택에 잘 어울리는 큰 우물로 벽돌같이 다듬은 화강석으로 원형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의 4변에 장대석을 이중으로 올린 후, 맨 위는 잘 다듬은 2개의 ㄱ자 장대석을 짜 맞추어 정사각형으로 마무리했다. 넓은 곳은 지름이 약 2m이고, 맨위 가장자리 장대석의 한 변의 길이는 1.8m, 깊이는 5.7m라고 한다. 조선 고종 9년에(1872년)세운 유허비가 우물 서쪽에 있다. 사적 제246호로 지정됐다.
말 목을 친 김유신
천관사(天官寺)터 천원마을의 교동들 가운데 있는 절터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라 명장 김유신이 청년시절 천관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말을 탔는데 깨어보니 천관의 집 앞이었다. 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돌아섰다. 천관은 그 뒤 비구니가 되어 일생을 유신을 위해 기도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훗날 유신은 천관이 살던 이곳에 천관사라는 절을 짓고 그녀의 왕생극락을 빌었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탑과 주춧돌만 남아 있고 복원을 위해 이 일대 4천여평을 매입했다. 1991년 1월 4일 사적 제340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최부자집 경주최씨 종택으로 1700년경에 지었다고 한다. 남천 북쪽 언덕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이 집은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ㅁ자형 골기와 집으로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한다. 12대 만석꾼과 9대 진사를 배출한 영남 최고의 부잣집이다.
절제와 겸양, 봉사의 솔선수범을 통해 선비의 도와 부자의 책임을 다해 온 최 부잣집의 사상과 정신이 깃든 불문율적인 가훈은 다음과 같다.
1)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3)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
5)시집온 새댁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6)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7)수입에 맞춰 지출하라.
8)파장물건을 사지 말고, 값을 깎지 마라.
전 재산 영남대학교에 기증
독립유공자 최준(崔浚)생가 최준(1884~1970년)은 교동 69번지 최 부잣집 종택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했고, 광복회 재무로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집 사랑채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에게도 거액의 독립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해방직후 나라를 이끌 인재를 길러야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독립유공자 최완(崔浣)생가 최완(1889~1927년)은 교동 68번지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의 동생이다. 1909년 신민회 계열인 대동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수립에 참가해 일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1921년 35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숙연당(肅然堂) 교리 문천 가에 있는 최세린(崔世麟)이 지은 서당으로 이조리에서 이전해 왔다고 한다. 도둑이 잦아 현판은 떼어서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이 건물은 동쪽 2칸은 방, 나머지 4칸은 마루로 이루어졌다.
교동법주(校洞法酒) 조선 숙종 때 사옹원 참봉을 지낸 최국선(崔國璿)이 궁중에서 익혀온 술 제조법을 대대로 전해온 교리 최 부잣집의 가양주이다.
교동법주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86-다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주기능보유자는 최경(崔梗)으로 명예기능보유자인 어머니 배영신(裵永信)에 이어 2006년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선정됐다.
경주의 대표 술 교동법주
교동석등(校洞石燈) 개인소유(최영식)의 석등이라 일반인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석등은 화사석과 지붕돌을 두지 않은 독특한 모습이다.
8각 기단부에 구름무늬 안상(眼象)을 2개씩 새겼고 2단으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은 사각 아랫단의 3구씩의 불상을 조각하였고, 8각 윗단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8각 기둥 위에 놓인 윗받침돌도 연꽃무늬를 둘렀다. 그 위로 마치 탑처럼 두 개의 연꽃받침을 쌓아 놓았다. 석등이라기보다 연화무의 좌대를 쌓아 놓은 듯 하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됐다.
활인당터 탑동과 천원마을 사이에 있던 남천가의 정자터로 늪지와 경치가 좋아 기러기가 자고 갔다고 한다. 사라호 태풍 이후 제방공사를 하고 도로가 나면서 없어지고 지금은 논이 되었다. 남천 둑길에서 천원마을로 들어가는 마을 진입로 어귀 양쪽에 있는 논이다.
천원사터와 우물 천원마을 가운데에 있는 절터와 우물로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에 천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우물만 남아있다고 한다.
채분골 도당산 북쪽에 작은 골짜기로 옛날 아이의 무덤을 쓰던 곳이다.
교동들 교리 남쪽의 천원마을이 도당산기슭에 있는 들이다.
향가비(鄕歌碑) 경주시가 1986년 계림 숲에 세운 비로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 충담사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새겼다. 이동호(李東浩)가 조각하고,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가 썼다.
천원마을 소방도로 개설
교동 천원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늘 함께 먹는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매입한 휴경지를 노인들이 협동농장처럼 경작해 양식을 마을회관에 비축해 놓고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먹는다.
이 마을은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문화재로 인한 제한이 많고 소방도로가 없어 주민생활이 불편해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특히 천원과 밭가운데 간에 680m에 이르는 소방도로가 없어 화재 시 대책이 없어 불안하다고 한다. 부지는 벌써 매입했는데 문화재 때문에 형상변경이 안돼 공사가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최인환(75 국제레미콘 회장), 안장우(71 법무사), 최종환(68 전 경주상공회의소 회장), 손수태(68 예비역 육군 소장), 최경(65 교동법주 기능보유자), 안장윤(62 울산대 교수), 최관(51 성균관대 교수), 최은(49 KBS PD), 최선(49 SK 상무), 최성길(49 부천지원 판사, 최부자 주손), 최혁재(41 재정경제부 사무관), 최준성(33 SBS PD)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최성환(독립유공자 최완의 손자), 최용부(경주교촌가 고택관리)님을 비롯한 교리 김수조 통장, 천원 유대곤 통장 등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이남미 간사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