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철 제 (경주고·향토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시대 관리들이나 주민들이 경주를 오고갈 때 서악 소티 고개를 넘어 건천 방면으로 가지 않고 사방을 통해 안강쪽 길을 많이 택하였다.
경주에서 안강 방면으로 갈려면 황성공원인 고양수(高陽藪) 윗길을 지나 지북리(枝北里)를 거쳐 용강동 광제원(廣濟院) 부근 광나루에 이르러 형산강을 건넜다. 서천을 건너 건천 쪽을 이용하지 않고 금장대 하류에 있었던 광나루를 이용한 원인이 무엇일까? 그에 관해서 여러 가지 민간 속설이 전하고 있다.
어쨌든 광나루를 통해 강을 오갔던 사람은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거나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특히 이 길을 많이 이용하였다. 1613년 11월에 동악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시를 남겼다. 이를 보면 경주 북쪽 적화곡(赤火谷)을 떠나 안강과 사방촌(四方村)으로 통하여 들어오는 여정을 그의 문집 ‘동악집’에 남기고 있다. 그 역시 형산강을 광나루를 건너 경주 관아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형산강 물은 금장대에 이르러 강폭이 급속히 좁아지면서 소용돌이친다. 지금의 금장교 부근에서 강을 건너면 그만큼 위험이 뒤따랐다. 광나루는 광제원(廣濟院)이 있는 나루터란 말이다. 강폭이 넓은 데서 안전하게 도강(渡江)한다는 의미에서 ‘광제(廣濟)’란 이름이 지어졌다.
1927년에 제작한 경주 지도를 보면 금장대의 강폭에 비해 광제원 나루터의 하상(河床)은 거의 두 배나 더 넓다. 광나루터가 있었던 용강동 656번지 강둑에서 나원리 계탑(季塔) 쪽으로 강물을 따라 비스듬히 밧줄을 메어두고 사람들은 강을 건넜던 것이다.
광나루를 건너 경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람이 반드시 머물렀거나 유숙했던 곳이 광제원(廣濟院)이다. 원(院)이란 나그네가 가볍게 쉬어갈 수 있는 간이 여관이다. 경주의 원은 동쪽에 혜리원(惠利院), 남쪽에 노곡원(蘆谷院), 서쪽은 금척원(金尺院), 북쪽에는 광제원이 있었다.
경주를 떠나가는 사람들은 광제원에 이르러 강을 건널 채비를 하였고, 또한 들어오는 사람들도 강을 건넌 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잔 술로 목을 축이고 입성(入城) 준비를 하곤 했었다. 당시 도로는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평탄치 못했다. 길 떠난 사람들은 산을 넘는 것보다 강 건너는 것을 더 위험한 일로 받아들었다.
광제원의 위치는 어디일까? 필자는 이를 찾으려 여러 번 갔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동경잡기’에는 경주부 북쪽 16리에 있다고 했다. 1798년에 제작된 집경전구기도(集慶殿舊基圖)에 고성(高城) 숲은 표시되었으나 광제원 표기는 없다. 현재 황성공원 내에 옮겨 놓은 박무의공수복동도비(朴武毅公收復東都碑)가 있다. 원래 이 비석은 1862년에 영해 원구리에서 돌을 다듬어 각자까지 마친 뒤 수로를 따라 운반하여 관아 의풍루 앞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옮길 때 기록을 보면 구만점(九萬店)-광제원-지북리(枝北里)-고양수(高陽藪)를 지나 읍성으로 들어오는 경로가 적혀 있다. 지북리는 지금 황성동 일대이고, 그 북쪽 용강동에 광제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 용강동 유도회장 정연희(鄭淵熙, 76)의 증언에 따르면, 광제원 자리는 용강동 719-2, 3번지라고 하였다.
광나루터에서 외길을 따라 들어오면 광중리 부락을 지난 뒤 들녘 가운데 광제원 터가 남아있었다. 이곳에는 비석 5, 6기가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부러졌다. 그러나 20년 전 이곳에 경지 정리를 하면서 시공업자가 비석을 모두 땅에 묻었거나 없애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지금 이곳 주변에는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광원제 터는 경지 정리로 인하여 형체를 잃어버린 뒤 다시 학교 신축 부지로 배정되어 복토가 진행 중에 있다.
서울에서 경주로 내려오는 관원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였기 때문에 이곳은 숱한 애환을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경계로 삼아 경주 사림(士林)이 남북으로 나눠졌다. 곧 광북(廣北)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가문이 대표하였고, 광남(廣南)은 경주 최씨가 중심이었다. 이는 현전하는 광남계안(廣南契案)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광제원을 달리 장승베기 또는 숫돌베기라고 부르는데, 곧 장승이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해방 전후 김재윤(金在潤)이 이곳에서 광제원약국을 경영하였다. 그는 광제원이 들녘 가운데 마을에 있다하여 중광리(廣中里)라고 바꿔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였다.
광제원과 나루터는 이미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상한 세월 속에 선인들의 발자취는 찾을 데 없지만 그래도 이곳에 작은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 후세 사람들을 고신(考信)케 하는 것도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