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골짜기 안이므로 ‘왕실’ → ‘왕신(王信)’ 왕기가 있고 왜군을 물리쳐 믿을 만한 곳 가을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산색도 아름답지만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의 색상도 참 아름답다. 강동면 왕신리 왕신들녘에도 부풀대로 부푼 황금 벼 알들이 오랜 가뭄 끝에 내린 촉촉한 단비에 몸을 식히고 있었다. 왕신은 큰 골짜기 안이 되므로 ‘왕실’, ‘왕신(王信)’이라 했다고 한다. 또 옛날 이곳에 왕기(王氣)가 있어 ‘왕신’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혹은 조선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 왜군을 물리쳐 믿을 만한 곳이라는 뜻으로 ‘왕신’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왕신(王信)’을 ‘왕신(旺信)’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안타깝다. 왕신은 화산불고기단지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그 북쪽은 강동면 국당리와 유금리에 닿아 있고, 서쪽은 강동면 모서리, 동쪽은 포항시 연일읍과 대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깊은 골짜기의 한적한 산골마을이었으나 최근 교통수단 발달과 산업도로 강동나들목 개설 등으로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 20여개의 크고 작은 공장과 교통량 급증으로 더 이상 산골마을이 아니다. 운곡서원과 왕신저수지, 경주공원묘원이 이 마을에 있다. 경주시청에서 13km, 18분 거리다. 손바우골 · 왕신(큰마을)이 왕신1리, 모정 · 안마을 · 마늘밭 · 새터가 왕신2리, 사라 · 다라골 · 점각단이 왕신3리를 이루고 있다. 무우씨 2만여평 계약재배 왕신1리는 100가구에서 3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와 사과(1만5천평), 배(2천평), 정구지(1만7천평), 한우(200두), 돼지(1천두) 등을 기르고 있다. 왕신2리는 56가구에서 1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벼농사와 감나무(7천평), 한우(50두)를 기르고 있다. 왕신2리는 경주이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25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왕신3리는 43가구에서 80명의 주민들이 벼농사와 무우씨앗(2만여평 계약재배), 젖소(130두), 염소(400두) 등을 기르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왕신2리 모전마을에 사는 김순이(95살 성지댁) 할머니로 건강이 좋지 않고, 거동이 불편하여 만나 뵙지 못했다. 과객 싫어 손바우 묻고 집안 망해 큰마을 왕신의 중심이며 가장 큰 마을로 ‘왕실’, ‘왕신(王信)’이라고 한다. 왕신의 원래 마을로 ‘원왕신’, 상왕신의 아래쪽에 있으므로 ‘하왕신’이라고도 한다. 강동초등학교 왕신분교 주변마을이다. (76가구) 손바우골 옛날 이 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과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게 싫었던 안주인이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방도를 물으니, 마을 앞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생긴 바위 3개를 흙으로 반쯤 묻고, 아침을 먹는 즉시 큰방에 앉아 마른 머리를 빗으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후 가세가 기울고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마을이름을 ‘손바우골’, ‘빈암(賓岩)’이라 하였다고 한다. 왕신 서남쪽 경주공원묘원 어귀에 있는 마을이다. 오천정씨 집성촌이나 지금은 5가구 남아있다. 본래 솥발처럼 생긴 바위라 ‘솥바우’, ‘정암(鼎岩)’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4가구) 모정(茅亭) 왕신의 위쪽에 있어 ‘상왕신’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마을에 모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모정’이라고 한다. (20가구) 안마을 마을이 안쪽에 있어 ‘안마을’이라고 한다. (10가구) 동제 옛날에는 동제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당목 큰 회나무가 당나무로 있었으나 일제 때 왜놈들이 베어갔다고 한다. 새터 상왕신의 남쪽 야산 기슭에 새로 생긴 마을로 ‘새터’, ‘새테’, ‘새각단’ 또는 ‘신기(新基)’라고도 한다. (7가구) 마늘을 실은 배 가라앉아 ‘마늘밭’ 마늘밭 옛날 안강일대가 호수였을 때, 마늘을 싣고 가던 배가 가라앉아 이 마을 일대가 온통 마늘밭이었다고 한다. 최근까지 산마늘이 많았다고 한다. 왕신 저수지 동북쪽에 있다. (16가구) 사라(舍羅) 동네와 너무 떨어진 외로운 마을이어서, 좀 더 많은 집이 생겨나고 번성하라는 뜻에서 ‘사라’라 불렀다고 한다. 또 경주김씨 집성촌으로 자손들이 나가지 않고 계속 이 마을에서 번성했으므로 ‘사라’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경주김씨가 16가구에 이른다. 운곡서원 동쪽에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22가구) 다라골 다래덩굴이 빽빽하게 많았던 곳에 이를 베어 내고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다래골’ 또는 ‘밀곡(密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새터 남쪽에 있다. (19가구) 점각단 옛날에 옹기점이 있던 마을로, 다라골 남쪽에 있다.(2가구) 안동권씨 시조 태사 권행 배향 운곡서원(雲谷書院) 고려 공신 안동 권씨의 시조 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귀봉(龜峯) 권덕린(權德麟)을 제향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9년(1785) 후손들이 이곳에 추원사(追遠祠)를 세우고 권산해·권덕린을 배향해 오다가 고종5년(186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었다. 그 뒤 광무 7년(1903)에 단을 만들어 제향하다가 1976년 신라 밀곡사(密谷寺)터로 추정되는 곳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중건하였다. 본당은 정면5간,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경덕사는 정면5간, 측면2간, 겹처마, 맛배지붕이다. 왕신저수지 동쪽 청수골에 있다. 권행은 본래 신라의 김씨(金氏)였다. 고창(古昌)군수로 있으면서 신라의 국운이 다함을 보고, 태조 왕건(王建)에게 귀의하였다. 뒤에 그는 견훤을 격파하고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태조가 “권행은 기미를 잘 알아 권도(權道)를 썼으니 권(權)에 능하다”하며, 권씨(權氏)의 성(姓)을 내리고 태사(太師)벼슬을 제수하니, 곧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다. 권산해는 권행의 후손으로 단종의 이모부이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으로 있다가 단종폐위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 뒤 세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잡히자, 높은 집 위에 올라가 투신자살하였다. 조선 정조 13년(1789) 관작이 복구되고, 같은 왕 15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영월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권덕린은 권행의 후손으로 회재 이언적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후일 회재의 종재매가 된다. 조선 명종 8년(1553)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회덕(懷德), 하동의 현감, 영천, 합천, 곤양 등의 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회재 선생을 위해 옥산서원을 창건하였다. 선조6년(1573) 45세에 돌아가자 운천서원(雲泉書院)에 제향했는데, 뒤에 이곳으로 옮겨 배향하고 있다. 유연정(悠然亭) 이 정자는 순조 11년(1811) 도연명의 자연사상을 본 받기위해 자연경관이 빼어난 계곡위에 세웠다고 전한다. 운곡서원 부속건물로 정면3간, 측면2간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방을 배치하고 양쪽에 마루를 놓았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밀곡사’로 추정 밀곡사지(密谷寺址) 부근에 와편이 다수 산재하며, 근간에 ‘밀곡사(密谷寺)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와 신라시대의 ‘밀곡사’로 추정된다. 1976년 권씨문중에서 이곳에 운곡서원을 복원하면서 절터의 일부석재를 서원축대 등에 이용하였다. 운천서원(雲泉書院)터 운곡에 있는 운천서원 터로 조선 영조 14년(1738)에 세워 선비 이언괄(李彦适)과 군수 권덕린을 모셨으나 1745에 헐린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 터가 어딘지 알지 못한다. 화산촌원(花山村院)터 옛날 화산촌원이 있던 자리로 천북과의 경계부근인 삐뜰바우 앞에 있다. 죽립사(竹笠寺)터 삿갓질에 있는 죽립(삿갓)사의 터로 ‘삿갓절터’, ‘삿갓암자터’라고도 한다. 상왕신 안마을 동쪽에 있다. 추원단(追遠壇) 조선 정조 9년(1785) 안동권씨 후손들이 운곡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우고 태사 권행, 죽림 권산해, 귀봉 권덕린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했는데 고종 5년에 헐리고 1903년 그 자리에 단(壇)을 세웠다. 과녁을 세웠던 산 과약삐알 옛날 활의 과약(과녁)을 세웠다는 산으로 함박골 북쪽의 강동 연일의 경계지점에 있다. 동뒤산 빈암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마을 뒤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메뚜기만딩이 함박골의 서쪽에 있는 아주 가파른 산이다. 무듬만딩이 조개핏등 동쪽에 있는 산이다. 안산(案山) 왕신마을 앞에 있는 산이다. 돌고개 새터 서북쪽에서 손바우로 넘어가는 돌이 많은 고개다. 사라재 사라 동북쪽에서 포항 남구 대송면 흥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진등재 진등 위에 있는 고개로 연일과의 경계지점에 있다. 강대골 손바우 남쪽에서 다라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개콧딩이 지형이 마치 개의 콧등처럼 생긴 등성이로 진등재 남쪽에 있다. 모개등 손바우 서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모개나무(모과나무)가 많았다. 큰골등 큰골 위쪽에 있는 등성이로 모정 동쪽에 있다. 속병에 좋은 약물 ‘약물내기’ 가재골 모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재가 많았다고 한다. 개앙골 안마을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넉바우골 함박골 북쪽에 넉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왕신 동북쪽이다. 도둑골 운곡 왼쪽 골짜기에 있으며 ‘도독골’이라고도 한다. 묵은정골 큰골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점(店)이 있었다고 한다. 문바우골 문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손바우 서남쪽에 있다. 불밋골 재궁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싱방골 손바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승방(僧房)이 있었다. 약물내기 왕신동쪽의 함박골 아래 있는 골짜기로 속병에 좋은 약물이 났다. 외실골 손바우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금 경주공원묘원이 들어섰다. 천북 오야로 넘어가는 골짜기라 ‘외실골’이다. 운곡(雲谷) 청석골 서쪽의 운곡서원이 있는 골짜기이다. 재궁골1 진씨의 재궁(재실)이 있었던 골짜기로 왕신 동쪽의 함박골 북쪽에 있다. 재궁골2 정씨의 재궁(재실)이 있던 골짜기로 손바우골 서쪽에 있다. 책바우골 책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함박골 동북쪽에 있다. 청석골 한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석(靑石)이 있다. 큰골 왕신의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모정 동쪽이다. 피밭골 왕신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한골 피밭골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마늘밭 동쪽이다. 함박골 왕신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험한골 왕신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매우 험하다. 홈시골 모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재골, 큰골의 어귀에 해당한다. 바위 두 개가 삐딱하게 손바우 손바우 마을 어귀에 있는 바위로 멀리서 보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빈암(賓岩)’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솥바우’, ‘정암(鼎岩)’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넉바우 넉바우골에 있는 넓적한 바위다. 모개바우 새각단 어귀에 있는 바위로 모깃불을 피우던 바위다. 문바우 마치 문처럼 생긴 바위로 문바우골 어귀에 있다. 불썬바우 매우 영검하여 불을 밝히고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고 하는 바위로 동쪽에 있다. 삐뜰바우 원테들 건너쪽 산에 있는 바위로 두 개의 바위가 삐딱하게 비뚤어져 있다. 책바우 책을 쌓아둔 것 같이 생긴 바위로 책바우골에 있다. 받침바우 큰 바위를 받치고 있는 바위로 새터 서북쪽에 있다. 돌고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이 바위는 염검 있는 바위로 돌을 받침바위에다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돌이 붙으면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한다. 갈밭들 왕신 동쪽에 있는 들로 갈대가 많았다. 굴웅징잇들 새터 동쪽에 있는 들로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 큰들 왕신 서북쪽에 있는 들로 마을에서 제일 넓은 들이다. ‘왕시잇들’, ‘왕신들’이라고도 한다. 순흥에서 은행나무 가지 꺾어다 심어 운곡서원 은행나무 운곡서원 앞에 있는 수령 400여년의 이 은행나무는 죽림공의 후손인 권종락(權宗洛)이 단종 때의 공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서울을 왕래할 때 순흥에서 큰 은행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외실골들 외실골에 있는 들로 지금은 경주공원묘원에 들어가고 들이 없다. 원테들 비뜰바우 건너에 있는 들로 옛날 화산촌원이 있었다고 한다. 한골들 한골에 있는 들로 마늘밭 동쪽에 있다. 황새밭 옛날 황새가 많았다는 왕신 북쪽에 있는 들로 큰들 서쪽에 있다. 왕신저수지 본래 ‘다라골’이었는데 마을을 이주시키고 1973년도에 못을 막았다. 이 못에 물로 왕신, 오금, 국당 일대의 들판에 물을 댄다. 벌곡못 빈암마을 남쪽에 있는 못으로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빈암못 빈암마을 안쪽, 경주공원묘원 안에 있는 못으로 오래전부터 있다. 왕신천 정비와 마을도로 확포장 이 마을 주민들은 왕신천 하천정비와 마을을 관통하는 지방도 확포장을 바라고 있다. 왕신천의 경우 왕신저수지에서 왕신교까지의 구간이 거랑 폭이 좁고, 유속이 빨라 범람이 잦고 생활에 불편이 많다고 한다. 또 경주공원묘원과 천북산업단지의 물이 빈암도랑으로 내려오는데 토사가 많이 떠 내려와 하천이 막히고 둑이 터져 그 정비가 시급하다고 한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천북-강동 간 지방도의 경우 산업도로 강동나들목과 보문관광단지 때문에 차량이 많이 늘어나 강동나들목에서 천북까지의 구간은 32m도로로 확장공사를 계획하고 있으나, 강동나들목에서 강동까지는 아직 계획조차 없다. 이 구간은 도로 폭이 좁고, 인도가 없는데다 교통량은 급증하고 있어 여간 위험한 게 아니라고 한다. 큰 차가 가면 노폭을 다 점령해 사고위험이 대단히 높다고 한다. 특히 과적차량이 단속을 피해 이곳으로 많이 우회하고 있기 때문에 과적·과폭 차량으로 인해 도로변의 담장과 집을 훼손하기도하고, 차량 교행도 안 된다고 한다. 도로의 확포장과 인도 확보가 시급하다. 우선 과속방지턱 설치와 과적차량 단속구간 조정으로 과적차량의 우회라도 막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권택훈(75 전 부산시 동구청장), 김무헌(69 전 경북과학고 교장), 이규종(65 강동농협조합장), 이종갑(60 전 경주시청 방재과장), 김영택(41 육군 중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를 위해 왕신1리 마을회관에 참석해주신 왕신1리~3리 마을 대표자님들의 후의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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