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을 가기위해 입실에서 효동재를 넘어가는 산자락에는 가을 햇살에 투영된 억새꽃 군락이 마치 왜적들과 용감하게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이 되살아난 듯 환상적인 몸짓으로 군무를 펼쳐 보인다. 왜적들의 출몰이 잦았던 이 일대는 우리선조들의 의병활동도 활발했던 곳이다.
경주시 양남면 지역으로 동해의 관성해수욕장이 있는 수렴리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의 동남단에 위치한 이 마을은 신서리와 상계리를 각각 북쪽과 서쪽에 끼고, 남쪽으로 안산을 사이에 두고 울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동은 행정구역은 경주지만 생활권은 울산이다. 경주는 1시간 거리지만 울산은 15분 거리에 불과하다. 경주에서 이 마을에 가려면 입실에서 효동을 거쳐 양남 하서로 넘어가는 길과 울산 호계에서 마우나오션을 거쳐 신대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거리나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 경주시청에서 40km 1시간 거리이다.
행정구역은 경주, 생활권은 울산
수렴에서 마우나오션쪽으로 수렴거랑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신서다리를 지나면서 정면으로 보이는 마을이 서동이다. 동북향으로 터진 작은 골짜기에 위치한 이 마을은 3면에서 산등성이가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라 안온한 느낌이 든다. 마을 뒷산기슭에는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었고, 마을 곳곳에 굵직한 엄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마을 어귀는 좁은데 그 안쪽 골짜기에는 넓은 못골들이 펼쳐져 있다. 3만여 평이 넘는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로 난 도랑에는 가뭄에도 불구하고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서동은 단일부락으로 30가구에서 65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경주이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8가구가 살고 있다. 옛날에는 70가구까지 되었으나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서동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옛날부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했다. 양남뿐만 아니라 재(관해재) 너머에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는 마을이라고 한다. 현재도 이 마을출신 박사가 9명이라고 했다.
이 마을의 농산물은 벼농사를 비롯한 상추, 깻잎, 고추, 감자 등 채소를 많이 하고 있다. 상추는 5농가에서 600여평, 깻잎은 5농가 300여평, 한우 50두를 기른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양남면장을 지낸 이상철(93 한밤댁) 할아버지로 바깥출입이 자유롭고, 정신도 맑고 아주 건강하다.
신라시대 ‘서촌(瑞村)’의 ‘서(瑞)’자 이어
서동(瑞洞) 본래 ‘웃서’, ‘상서(上瑞)’라고 불렀으며, 훗날 군사들이 경작하던 농토가 있어 ‘둔전(屯田)’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신라시대부터 양남 일대는 ‘서촌(瑞村)’으로 불렸으며, 그 가운데 서동 일대를 ‘상서(上瑞)’, 환서리 일대(석읍, 석촌)를 ‘중서(中瑞)’, 그 아래를 ‘하서(下瑞)’, 나아 일대(나산)는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서동(瑞洞)’의 이름값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신라시대 ‘서촌(瑞村)’이었던 양남에서 ‘서동(瑞洞)’만 본래의 ‘서(瑞)’자를 지니고 있고, 그 외 나머지 땅이름은 모두 ‘서(西)’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동제 이 마을은 매년 음력 6월 초정일에 동제를 지냈는데 이젠 동제를 지낼 사람이 없어 6년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당목 이 마을의 당나무는 오래된 참나무로 마을 동쪽 안산기슭에 있다.
“산도 걸어 갈 수 있느냐”
안산(案山) 서동 마을 앞에 있는 산이라 ‘안산’이라고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여인이 빨래하러 가다가, 이 산이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산도 걸어 갈 수 있느냐”고 하자, 그 자리에 멈추었다고 한다.
어귀절산 마을 서쪽에 위치해 안산과 마주하고 있다. 산 어귀에 절이 있었다고 ‘어귀절산’이라고 한다.
아리랑고개 서동에서 울산 울주군 강동면 신명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길이 고불고불하여 ‘아리랑고개’라고 한다. 옛날에는 울산으로 가는 주요 통로였다. 광징이에 있는 고개라 ‘광징이고개’라고도 한다.
당미기 서낭당이 있었다는 고개로 진등 남쪽에 있다.
꽁꼬불 울산, 신대, 상계와의 경계지점인 어귀절산 너머에 있는 등성이다.
진등 못골 서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울산과의 경계지점이다. 이 등성이가 마치 뱀의 형국인데 그 끝에 어떤 사람이 묘를 썼는데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더 큰 부자가 되려고 그 위에 뱀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묘를 옮겼더니 다 망해 자손조차 없다고 한다.
뱀 머리에 묘 옮겨 집안 망해
새아골 안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고지골 안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다.
북녘골 서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가골 서동 남쪽에 있다. 아리랑고개 아래에 있다.
광징이 서동 남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아리랑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덕골 서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석탄 광산이 있었고 최근까지 갱도용 레일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어구절 어귀사라는 절이 있던 골짜기로 꽁꼬불 동남쪽에 있다. 불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도 주춧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절골 절이 있던 서동 남쪽 골짜기이다. 지금은 포령사와 조계사가 들어서 있다.
큰절골 절골의 큰 골짜기로 서동 남쪽에 있다.
적은절골 절골의 작은 골짜기로 서동 남쪽에 있다.
피낫골 과목들 서남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 전쟁 때 숨기고 피난했던 곳이다.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 활약
고짓골 서동 동쪽에 있는 들이다.
과목 서동 서북쪽에 있는 들로 오랜 된 늙은 감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과목’이라고 했다고 한다.
꽁꼬불 서동 서쪽에 있는 들이다.
못골들 서동 서남쪽에 있는 들로 물이 새기고 땅이 많이 질고 빠져서 ‘못골’이라고 한다. 이곳은 청청하여 미꾸라지가 많아 1989년에 미꾸라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집앞들 서동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피낫골들 피낫골에 있는 들이다.
도감터 울산, 상계, 신대, 서동의 경계지점에 있는 꽁꼬불 위에 군사의 훈련을 맡았던 도감이 있던 터이다. 이 일대는 왜놈들의 침략이 잦았던 곳으로 의병들의 활약이 많았던 곳이다.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도 이곳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개구리바위 마을 남쪽 진등의 형세가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형국인데 등성이 앞에 개구리에 해당하는 큰 바위를 ‘개구리바위’라고 한다. 5년 전에 마을안길을 내면서 땅에 묻었다.
뒤서당터 경주이씨 집안에서 세운 서당으로 마을 뒤에 있어서 ‘뒤서당’이라고 불렀는데 수년전에 허물어지고 무성한 대밭만 남아 있다.
서동 ~ 울산 간 연결도로 개설
이 마을 못골에서 울산 북구 대안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개통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길의 울산 구간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곳의 경주구간이 아직 안 되어서 교통이 불편하다고 한다. 이 도로가 개설되면 울산으로 넘어가는 지름길로 활용되어 마을이 많이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상철(93 전 양남면장), 이종필(85 전 영남대 교수), 이동식(85 전 이동식 내과의원), 이정희(72 전 경북대 교수), 이준희(60 대구 의사), 황보정용(35 공군 소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김만수 이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