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을 지나 전형적인 농촌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동. 몇 안되는 집들 사이로 환하게 웃는 이원선(56)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쪽물을 만들고 있었다는 목소리에서 풍겨져 나오는 믿음직스러움과 전형적인 어머니의 다정함에 흠뻑 매료되어 마치 친정집에 왔다는 착각마저 일으킨다. 대문도, 집지기 개도 없는 집을 들어서니 보랏빛 천일홍과 보기만 해도 입이 벙글어지는 과꽃, 온갖 야생화들이 집주인만큼이나 화사하게 반긴다. 별명? 보증수표 콩 이파리 아줌마 초록빛 생콩잎을 따서 오막단지에 돌로 눌러 쌈콩잎을 제일 먼저 만들었단다. 영남인들 특유의 음식인 이것을 사시사철 즐기기 위해 하우스 재배를 처음 시작했다. 33년째 한번도 어기는 일 없이 만들다 보니 일본에까지 소개할 기회가 있었고, 궁중요리사들까지 자문을 구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쌈콩잎을 담는 일은 손수한다. 먹어본 사람들의 입맛이 그녀의 손맛을 원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농가에서는 논농사에만 주력한 반면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계절별로 다양한 복합영농을 실천한 앞서가는 농촌여성이었다. 처음 시장에 나가게 된 계기는 그녀가 스물두살 때였다. 그 해 벼농사가 잘 안되는 논에 배추를 심었더니 너무 잘 자랐다. 이웃에 나누어 주었는데 시든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해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배추 10단을 가지고 황남시장으로 팔러나간 것이 지금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에 매일 다니는 차비마저 아까워 자전거를 배워 타고 다니고 150원하던 국밥 한그릇도 못 사먹으며 채소 판 돈 모두 시어머니께 드렸지만 시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한때 그녀도 공무원에게 시집가서 말끔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웃으면서 배웅하는 게 소원이었단다.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남편과의 오붓한 신혼의 꿈도 접어야 했고, 외동아들이었던 남편은 철도공무원을 포기하고 농부의 길을 걸었다. 남편과 단둘이 지내본적이 없어 마음에 가시로 걸려 있다고. 그녀는 오래전 가슴아픈 추억 하나를 떠 올렸다. 사촌동서네 갔을 때, 손수 쌀을 담아와 밥을 짓고 지갑을 챙겨 반찬을 사러 가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면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어 눈이 퉁퉁 붓도록 실컷 울었단다. 자신은 10여년을 내주는 쌀로 밥을 하고 살림을 해오다보니 부러운 마음이었나보다고 지금도 눈물을 훔친다. 열정적인 사회봉사활동 사회활동의 시발점은 시어머니의 부녀회 활동을 도우면서였다. 회원이 돌아가면서 생활용품을 팔았는데 빈틈없이 하는 것을 보고 농촌지도소 생활개선 구락부, 새마을부녀회, 농협 주부대학 등 여러 단체에서 일을 맡겼고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두 번의 허리디스크수술로 지금은 건강이 허락하는 만큼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원선씨는 자신이 말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을 진다. 지난해 방폐장유치 홍보시에는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다녔다. 맞기도 하고 거친 욕설도 들었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누구보다 바쁜 하루를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해, 함께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밥을 짓고 숭늉과 된장찌개를 끓여 오기도 했다. 하루 4시간 잠자고 새벽에 깨어 시장에 콩잎 내다 팔고, 역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화장하고 다음 행선지로 나설 만큼 바쁘게 살았고, 지금도 여전하다. 저승 가서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이원선씨는 현재 생활개선회 남부지회 회원으로, 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 농가주부회(농사짓는 젊은여성)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 명의 아들과 며느리 얘기를 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 투박해진 손으로 꽃밭에 물을 주며 꽃처럼 밝게 웃던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박인복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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