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천 대동여지도에 ‘동해천(東海川)’ 표기 오곡백과 익어가는 풍성한 가을 문턱에서 맞는 민족 대명절 한가위다. 올해는 더운 여름날씨 덕분에 모든 과일이 맛있게 영글었다니 잘 영근 과일만큼이나 넉넉한 한가위였으면 좋겠다. 용당(龍堂)은 경주시 양북면 지역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죽어서도 호국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겠다고 한 문무대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용당은 감은사에 호국용이 된 문무대왕이 출입하도록 판 지하수로 어귀에 깊은 용소가 생겨 이를 ‘용담(龍潭)’, ‘용당’, ‘돌담’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경주에서 양북면소재지 어일을 거쳐 감은사와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동해로 가는 길에 넓은 들판과 그 가운데로 마치 활주로처럼 곧게 뻗은 929번 지방도로를 만나는데 그 양쪽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 용당이다.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한 이 마을은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동해천과 넓은 감은들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다. 동쪽은 동해에 이르고, 서쪽은 어일리, 남쪽은 두산리와 구길리, 북쪽은 연대산을 사이에 두고 감포읍 대본리, 팔조리와 맞닿아 있다. 경주시청에서 32km, 38분 거리이다. 연안차씨 집성촌 ‘도장골’ 용당은 한 때 ‘용담’, ‘도장골’, ‘탑마을’이 용당2리, ‘원당’이 용당1리로 구획되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한 마을로 다시 통합되었다. 도장골, 원당은 연안차씨 집성촌으로 현재도 4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용담은 신안주씨 집성촌으로 17가구가 살고, 탑마을은 경주손씨, 경주김씨, 전주유씨 등이 어울려 산다. 용당은 현재 120가구에서 300여명의 주민이 주로 벼농사와 한우(300두), 젖소(40두), 정구지(4천평), 토마토(600평), 미나리(800평), 산나물(참취, 원추리, 울릉도나물, 방아나물, 음나무, 두릅 등 4천여평) 재배로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98세의 차우강(서동댁) 할머니로 3년 전까지 감은사에서 농산물 판매를 할 정도로 건강했으나 지금은 기력이 떨어져 바깥출입이 좀 어렵다. 도장골 출신인 차 할머니는 키도 크고(약 170cm)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50년째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평소에 음식을 가리는 게 없이 뭐든지 잘 자신다고 한다. 감은사 삼층석탑 있는 ‘탑마을’ ■ 원당(院堂) ■ 이 마을은 옛날 흉년으로 곤궁해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고(賑恤庫)와 원(院)이 있어 ‘원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당리(院堂里)’라고도 하며, 도장골 서쪽에 있다. (29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제를 지낸다. 당목 마을 옆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이며 제물은 동답 수익금으로 마련한다. 제관은 마을사람 중에서 복(服)을 입지 않은 사람을 가려 정한다. ■ 도장골 ■ 옛날에 한 도승이 이곳에 숨은 기운이 있다고 한데서 유래하여, ‘도장곡(道藏谷)’, ‘도장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옛날 도장이 있었으므로 ‘도장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담 북서쪽에 있다. (30가구) 동제 도장골은 음력 6월 15일에 지낸다. 본래는 정월과 유월 보름에 각각 1회씩 2회를 지냈으나 10년 전부터 6월15일에 1회 지낸다. 당목 원래 회나무가 있었는데 1972년에 태풍으로 쓰러졌다. 후계목으로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태풍 매미로 또 넘어졌다. 지금은 쓰러졌던 회나무 뿌리에서 후계목이 자라나 그 나무를 당목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다. ■ 용담(龍潭) ■ 도장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담’, ‘용당(龍堂)’, ‘돌담’, ‘용담리(龍潭里)’라고도 불렀다. 용담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대왕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창건하여 호국용이 된 부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지하수로를 만들었는데, 이곳 어귀에 생긴 깊은 웅덩이를 말한다. ‘돌담’은 용이 못(潭)을 돌았다는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감은사 동남쪽에 위치한 이 웅덩이는 길을 확장하면서 감포와 양남 봉길로 가는 삼거리와 대종교 다리가 놓이면서 거의 다 메워지고 그 흔적 일부만 남아 있다. (34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2월 2일이 되면 동제를 지낸다. 당목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이며, 제물은 동답 수익금으로 마련한다. 제관은 마을사람 중에서 복(服)을 입지 않은 사람을 가려서 정한다. ■ 탑마을 ■ 감은사 3층 석탑이 있는 마을이라 ‘탑골’, ‘탑마을’, ‘탑리(塔里)’, ‘탑동(塔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용담 남동쪽에 있다. (22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경에 좋은 날을 받아 동제를 지낸다. 당목 감은사 터에 있는 수령 300여년의 느티나무이다.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한 금당 감은사(感恩寺)터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문무대왕이 부처님의 원력을 빌어 왜구를 물리치려고 동해가 보이는 이곳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돌아가니,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682년에 완성하고 부왕의 은덕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감은사는 정면 5간, 측면 3간의 금당(金堂)을 짓고 그 아래 공간에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며 쉴 수 있도록 설계했다. 금당의 북쪽에는 정면 8간, 측면 4간의 강당(講堂)이 있었고, 강당과 중문을 회랑으로 돌렸다. 또 금당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감은사3층석탑(感恩寺三層石塔) 감은사 터에 있는 동서 2기의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 전체 높이 13m에 이르는 신라시대 삼층석탑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1959년 해체 수리중에 서탑 3층 몸돌에서 청동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 뒤 1996년에 동탑에서도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감은사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도 대략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2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용당리 55-1번지에 있다. 현재 이 탑은 보수 중에 있다. 단종 승하로 관직 버리고 은거 도장서당(道藏書堂) 강열공(剛烈公) 쌍청당(雙淸堂) 차운혁(車云革)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하는 곳이다. 묘우, 강당, 삼문이 있으며 1954년 용당리 423번지에 세웠다. 공의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조선시대 단종(端宗)이 승하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도봉산에 은거했다. 세조 12년(1467)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정북선봉장이 되어 싸우다가 단주에서 순절했다. 적개공신 3등에 녹훈되고 병조참판에 추증, 연천군(延川君)에 봉해졌다. 순조 28년(1828)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헌종 7년(1841) 강열(剛烈)의 시호가 내려졌다. 영정을 봉안한 장절사(莊節祠)는 1964년에 도장서당 안에 세웠다. 향사는 매년 음력3월 중정에 지낸다. 사일정(事一亭) 본래 연계(蓮溪) 차규철(車珪撤)이 후학을 지도하던 서당이었는데 1975년 제자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세운 정자이다. 도장골에 있다. 육우정(六友亭) 연안차씨(延安車氏) 윤규(潤奎), 광규(光奎), 화규(華奎), 영규(永奎), 명규(明奎), 찬규(燦奎) 등 6형제의 우의를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73년 원당에 지은 정자이다. 영모재(永慕齋) 안동인(安東人) 동은(東隱) 권석물(權碩物)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공의 묘소가 있는 용담 연대산 기슭에 세운 재실이다. 일제시대에 세운 이 재실은 정면4간, 측면 2간의 남향 팔작지붕이다. 양쪽에 방, 가운데 2간은 청마루를 배치했다. 대종천 아닌 ‘동해천’으로 불러야 동해천(東海川) 토함산 동쪽 물과 함월산 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합수하여 문무대왕수중릉이 있는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거랑이다. 대동여지도에 동해천(東海川)으로 표기돼 있는 이 거랑을 최근에 대종천이고도 부르는데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꾸며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감은사에 있는 대종(大鐘)을 싣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대왕암 부근에서 파선되어 바다에 종이 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도 파도가 심하게 치면 바다 속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이 거랑을 ‘가미내’, ‘가밑거랑’, 또는 ‘용당천(龍堂川)’이라고도 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과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등 우리 영토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지 않는 상황에서 동해로 흐르는 이 거랑이 ‘동해천’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대종천을 버리고 동해천이라는 본디 이름을 써야할 것이다. 감은들 감은사 앞에 펼쳐진 넓은 들이다. 동답(洞畓)들 동네 소유의 논이 있었던 들로 감은들 동남쪽에 있다. 가밋보 감은들의 용담 앞 옛날 길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보로 ‘가미잇보’라고도 한다. 감불 감은개 위에 있는 모랫벌. 감은(感恩)개 감은사 터 아래에 있는 개로, 탑동 동남쪽에 있다. 바람이 센 골짜기 개뭇고개 감은사에서 대본3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감은사 동쪽에 있다. 개뭇골 개뭇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로 감은사 동쪽에 있다. 대밭골 대나무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감은사 뒤 웅굴골 북쪽에 있다. 대밭골 원당 북쪽에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다. 지금도 신이대가 많다. 동짓골 도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다. 웅굴골 우물이 있었던 골짜기로 대밭골 북동쪽에 있다. 큰골 동짓골 북쪽에 가장 큰 골짜기이다. 연대산 동남쪽에 해당한다. 바람골 도장골 북쪽골짜기로 바람이 아주 세다고 한다. 산태골 산태가 무너진 자리가 있는 골짜기이다. 도장골 동쪽에 있다. 집태골 집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전 취수장 때문에 물 모자라 이 마을에 펼쳐진 감은들은 용당, 구길 일대의 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본래 이 들은 토함산과 동대봉산에서 흘러내리는 동해천의 풍부한 물로 농사가 잘 되었다. 그런데 70년대 월성원전 취수장이 생기면서 하루 4천 톤의 물을 퍼가니까 동해천이 마르고 농업용수 부족으로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많다. 양수기를 이용해 물을 퍼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농수로와 농로정비 사업이 시급하다. 농수로 정비가 이루지지 않아 수초로 인해 도랑이 구실을 잘 못하고 있고, 물 효율이 떨어진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권영길(58 경주시의원), 차재일(45 서울 변호사), 차승백(37 서울 변호사), 차도식(33 대구 공인회계사) 등이 있다. 마을취재를 위해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안내해 주신 류만희 이장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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