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두방산 북쪽기슭의 작은 마을
화곡은 조선 영조 때의 선비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建) 선생이 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호를 따서 ‘화실(花室)’이라고 불러오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의 산세가 꽃 같다거나,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화실`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화주산(火朱山:소두방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화실(火室)`이라 부른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화곡은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 북쪽 약 300m 지점의 고속도로 밑으로 나 있는 굴다리를 통해 서쪽으로 약 5km 정도 들어가면 율동과 내남 망성리를 지나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의 벽도산과 남쪽의 소두방산이 흘러내리면서 빚어낸 올망졸망한 자락에 위치한 산간마을이다. 울산, 내남 방면에서 이 마을을 가려면 이조에서 덕천을 거쳐 화곡으로 넘어가는 길을 택하는 게 훨씬 가깝고 빠르다. 요즘 고속철도 건설공사와 화천역사와 명계를 잇는 국도 개설공사가 한창이다.
화곡은 벽도산을 경계로 고속철 신경주역사가 들어서는 건천읍 화천리와 맞닿아 있고, 소두방산을 중심으로 망성, 덕천, 상신, 비지, 부지 등과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큰각단’, ‘아릿각단’, ‘새각단’, ‘벤다골’ 등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화실’이 화곡1리, ‘송림’, ‘어련’이 화곡2리를 이루고 있다.
화실은 38가구(실 거주 31가구)의 작은 마을로 80여명의 주민이 주로 벼농사와 고추, 한우(200두)를 기르며 생활하고 있다.
화실은 경주김씨 집성촌으로 현재는 7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최고령자는 올해 93살의 권선두리(화동댁) 할머니로 몸이 편찮아 서울 큰 아들댁에 가 있다.
고속철도, 신설국도, 동해남부선 관통
큰각단 화실 본동 제일 큰 마을이다. 마을회관 있는 곳이다. (10가구)
아릿각단 큰각단 아래쪽에 있다고 ‘아릿각단’이라 불린 이 마을은 7가구정도 있었으나 고속철도, 신설국도, 저수지 등에 들어가고 2004년경에 마을이 없어졌다. 화곡 동쪽에 있었다.
새각단 마을 어귀에 새로 생긴 마을로 동해남부선 이전 부지에 들어가 이 마을도 철거될 예정이다. (7가구)
벤다골 화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하여 ‘삔다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혹은 옛날부터 훌륭한 선비가 많이 났다고 하여 ‘반다곡(班多谷)’이라 불리던 게 변해서 ‘벤다골’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4가구)
동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열흘날에 동제를 지냈으나 2004년 고속철도공사로 당나무를 베어낸 후로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당나무 이 마을 당나무는 폭우나무로 2백여년된 고목이었다. 태풍 매미로 인해 넘어졌던 것을 2004년 고속철도 공사로 베어냈다.
옥산서원 원장 3번 지낸 ‘화계’
화계서당(化溪書堂) 조선 영조 때 진사 화계 유의건(柳宜建)이 영조 11년(1735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으로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그의 7세손 인선(寅鮮)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공의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역학에 달통해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라능진안설’로 유명하다. 공은 옥산서원 원장을 3번이나 역임했으며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기도 했다.
화곡저수지 아래 지중산(芝重山 화실주민은 강당산이라고 한다) 기슭에 자리한 화계서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골기와 지붕이 낡고 허물어져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본래 ㄱ자 건물이었는데 보수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줄였다고 한다. 화계정(花溪亭)이라고도 한다. 현재 이 서당은 내남면 부지1리에 속해있다.
화계사(花溪祠)터 화계 류의건을 향사하던 사당이 있던 터로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화실 동쪽 서당골의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화계사는 정조 16년(1792)에 상현사(象賢祠)를 새로 세워 화천사(花川祠)라 했는데, 고종 7년 (1870) 금령으로 헐리고 상현사(象賢祠)만 남아 있었으나 건물이마저 팔려 암곡으로 옮겨간 것으로 알려졌다.
동현재(東賢齋) 조선 초기에 동부령을 지낸 신안인(新安人) 주내경(朱乃敬)을 추모하여 그 자손들이 1980년대에 화실에 지은 재실이다. 이 재실은 본래는 그 남쪽에 있었는데 부지가 고속전철에 들어가고 2004년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남향으로 지은 이 재실은 정면 4칸 팔작지붕이다. 서편에 관리사도 지어 놓았다.
화곡리고인돌 화실 동쪽 화곡저수지 옆에 있는 길이 3.6m, 너비 3.25m, 두께 1.8m의 큰 돌무덤이다.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6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돌을 사방에 깔아 묘역을 만든 것이 특이하다. 소두방산 기슭에 있다.
아들 죽고 애비 통곡할 뿐
소두방산
소두방산(315m) 마치 소두배이(솥뚜껑)처럼 생겨‘소두방산’이라고 한다. ‘살자산(殺字山)’, ‘성부산(星浮山)’, ‘화주산(火朱山)’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어떤 사람이 벼슬을 얻고 싶어 아들에게 밤에 이 산꼭대기에 횃불을 들고 서 있게 했다.
그날 밤 사람들은 이상한별이 나타났다고 두려워했고, 급기야 왕이 재앙을 물리칠 용한 사람을 찾기로 했다. 그 때 일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아들이 죽고, 그 아비가 슬피 울 일일뿐입니다.” 했다. 과연 그날 밤 횃불을 들고 있던 아들이 범에 물려 죽고, 그 아비는 슬피 울었다 한다.
또 태종무열왕 때 신라군이 백제와의 싸움으로 한산주(漢山州)에 주둔하고 있는데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들이 신라군을 포위해 왔다. 일이 위급해지자 김유신은 성부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빌었다. 그때 집체만한 불덩이가 솟아올라 별처럼 떠서 적진을 향해 날아가 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이 산을 성부산(星浮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강당산(講堂山) 화계서당이 있는 산으로 화곡리와 망성리에 걸쳐 있다.
따배산 지형이 마치 따뱅이(또아리)처럼 생긴 산으로, 어연 북쪽에 있다.
주산(朱山) 신안주씨(朱氏)의 선산으로 화실 서북쪽에 있다.
선작골고개 선작골에 있는 고개이다.
수박골재 화곡 서쪽에서 건천읍 화천리의 수박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도꼬불`이라고 한다.
화계사 터로 추정되는 ‘서당골’
대롱골 뒷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도룡골(倒龍谷)’이라고도 한다.
따밧골 따배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박숫골 화곡의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안골 벤다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서당골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이다. 이곳이 화계사터로 추정된다.
선작골 어연과 화곡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들이다.
큰금실 옛날에 금광이 있었던 금실의 큰 골짜기로 새각단 뒤에 있다.
듬바우 소두방산 북쪽 7부 능선에 있는 둥근 바위다. 맷돌바위 아래에 있다.
맷돌바우 모양이 마치 맷돌처럼 생긴 바위로 성부산에 있다.
맷돌바우 주산에 있는 마치 맷돌처럼 생긴 바위이다.
안그다미 방구 도꼬불에 있는 높이 솟아있는 바위로 이곳에 돌을 던져 돌이 바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평풍바우 병풍을 둘러 친 것처럼 바위가 죽 늘어서 있다. 성부산 범바우 서쪽에 있다.
돌이 얹히면 아들 낳아
금실 화실 동쪽의 골짜기로 지금의 새각단 뒷들이다. 옛날에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뒷들 화실 마을 뒤에 있는 들이다.
마을앞들 화실 앞에 있는 들이다. 고속전철에 대부분 들어가고 일부만 남았다.
선거랑들 섬거랑 가에 있는 들이다.
선거랑 기린내[麟川]로 흘러가는 거랑으로 화실 앞에 있다.
화곡저수지(花谷貯水池) 화실 동쪽에 있는 저수지로 1958년에 막았다.
뒷들못 뒷들에 있는 못으로 예전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새로 막았다.
박수지 박숫골에 있는 못이다.
사창보 새창들에 물을 대는 화실 서북쪽에 있는 보. ‘새창보’라고도 한다.
아릿보 말앞들의 아래쪽에 있는 보로 고속전철에 들어가고 없다.
웃보 아릿보의 위쪽에 있는 보로 고속전철에 들어가고 없다.
마을회관 새로 지어야
물 좋고 공기 맑은 산골마을 화실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자리한 조용한 마을이었으나 최근 고속철도와 화천 명계간 국도 개설, 동해남부선 이설 등으로 산은 뚫리고, 마을과 논밭은 콘크리트구조물로 가득 채워져 옛 정취는 간데없다. 소두방산이 막혀 마을에 인물이 나지 않고 마을이 안 된다는 주민들의 푸념 섞인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이 마을 주민들은 낡은 마을회관을 다시 지었으면 한다. 또 농로포장과 수로정비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방안지 못에 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수문을 기계식으로 고쳤으면 한다. 물속에 들어가 굴통을 열어야 하는 일이 너무 위험하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태술(52 인천 세무서)씨가 있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