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동은 경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큰 거랑인 서천과 남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부드럽고 고운 모래가 많다 하여 ‘사정(沙正)’이라 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을 통해 경주로 들어오는 관문인 금성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펼쳐진 마을이다. 경주의 젖줄인 형산강 상류인 서천과 문천도사(蚊川倒沙)로 유명한 남천을 서쪽과 남쪽에 각각 끼고 있다. 동쪽은 내남사거리에서 내남방면으로 나 있는 35번국도의 서편의 옛날 ‘순라길’을 경계로 황남동과 마주하고 있다. 북쪽은 태종로를 경계로 노서동과 맞닿아 있다. 경주공업고등학교와 신라초등학교, 서라벌문화회관, 흥륜사 등이 이곳에 있다. 사정동은 흥륜들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들의 북쪽 도심에 위치한 ‘사정’과 그 남쪽 남천변의 들판에 자리한 ‘국당’으로 구획된다. 사정은 도심마을로 옛날 경주역이 있던 서라벌문화회관 일대의 ‘효문리’, ‘구역거리’, ‘뒤사정’과 그 남쪽, 경주공고를 포함한 일대의 ‘앞사정’으로 이루어졌다. 국당은 농촌마을로 흥륜사 앞쪽의 ‘앞각단’, 그 뒤쪽의 ‘뒷각단’, 동쪽의 ‘숲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57년부터 비닐하우스 큰 거랑 2개와 흥륜들, 구들들 등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졌다. 특히 사질양토의 밭이 많아 1957년부터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특용작물을 재배한 앞선 농업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씨없는 수박을 개발했던 우장춘 박사의 원예시험장이 있었던 곳으로 경주에서 가장 특용작물을 먼저 했던 마을이다. 지금도 벼와 보리 외에 딸기, 토마토, 오이 등의 시설작물을 많이 하고 있다. 사정동은 행정구역상 탑정동에 속해 있으며 현재 11개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천476가구에서 3천262명(남1,599 여1,663)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농협조합원이 140세대이며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아온 토박이는 10%정도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97살의 이영출 할머니로 현재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 사라호 태풍으로 폐허되어 -사정(沙正) 서천과 남천이 합수하는 지점에 있는 마을로 모래가 많다 하여 ‘사정(沙正)’이라고 했다고 한다. -구역거리 일제 때 경주역이 있었으므로 ‘구역(舊驛)’이라 불렀다. 지금의 서라벌문화회관 일대이다. 사정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 ‘뒤사정’이라고도 한다. -앞사정 사정의 앞쪽에 있는 마을로 경주공고 뒷길을 기준으로 그 앞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밭이었으나 지금은 학교와 주택이 들어서 있다. 경주시장 관사도 이 마을에 있다. 장터 뒷사정의 앞쪽에 있는 마을로 사정장이 섰던 곳이다. 서라벌문화회관 남쪽일 것으로 추정된다. -효문리 경주읍성 남문 밖의 구역(옛 경주역으로 지금의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마을로 고려 때 효자 손시양(孫時揚)이 살았고, 그의 효자비가 있었으며, 오천정씨 효열각이 있던 마을이다. 이곳에 들어선 역을 ‘효문역’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손시양의 효자비는 황남동으로 옮겼으며, 오천정씨 효열각은 국당 흥륜사 서쪽 금성로 옆으로 이전했다. -국당(菊堂) 서천과 남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로 본래 물구디이(구덩이)를 메우고 일군 마을이라 ‘구디이마을’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국당(菊堂, 國堂)’이 되었다고 한다. 또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당이 있었다고도 한다. 국화를 재배하는 집이 있어 ‘국당’으로 불리었다는 얘기도 있다. 사라호 태풍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던 마을을 다시 일으켰다고 한다. -앞각단 국당의 앞쪽, 남천 옆에 있는 마을로 거랑가에 있어 ‘거랑각단’이라고도 한다. -뒷각단 국당의 뒤쪽, 흥륜사터 뒤에 있는 마을이다. -숫각단 국당의 동쪽, 숲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경림숲의 일부가 남아 있던 부근에 이루어진 마을이다. -동제 및 당목 흥륜사터 서쪽에 있던 오래된 포구나무와 회나무가 당수나무로 섬겼으나 고사하여 10여년전에 베었다. 이 나무 사이에서 목 없는 불상이 출토되었는데, 그 후 나무가 고사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나무 앞에서 동제를 지냈으나 30여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신라최초의 사찰 흥륜사 -흥륜사(興輪寺) 터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절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264년(미추왕 3) 고구려 승려 아도가 공주의 병을 고쳐주고, 왕의 허락을 받아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로 규모도 작고 창건연대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눌지왕(417-457년)대에 창건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흥륜사는 그 후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이 순교로 533년부터 중창을 시작하여 544년(진흥왕 5)에 완공하여 ‘대왕흥륜사’라 불렀다. 대법회를 주관하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중심 도량이 되었으며 매년 사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금당 앞의 탑 주위를 돌며 염불하는 복회가 열렸다. 삼국유사에는 흥륜사와 관련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의 어머니가 밭을 시주하여 김대성이 재상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는 설화와 김현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어 벼슬을 했다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흥륜사의 금당 동쪽 벽에는 아도, 이차돈, 의상, 혜숙, 안함, 서쪽 벽에는 표훈, 사복, 원효, 혜공, 자장 등 10명의 고승을 진흙으로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흥륜사 남문은 ‘길달문(吉達門)’이라고 불렸는데 귀신인 길달이 지었다고 전한다. 흥륜사는 고려시대까지 왕실의 도움으로 번창했으나 조선시대 들어 화재로 폐사했다. 절터에 있던 석조와 배례석 등의 석물을 조선시대 경주부윤이 동헌으로 옮겨간 것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조는 남아 있는 신라시대 석조 중 가장 크다. 또 일제시대 이곳에서 출토된 ‘신라인의 미소’(사람얼굴무늬가 있는 수막새)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반환되었다. 1970년대 부분발굴조사에서 금당 앞에 8각 탑이 있었던 자리와 동쪽에서 회랑지가 확인됐다. 이곳에는 1980년에 원만스님의 원력으로 지은 흥륜사(주지 법념스님)가 있으며,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이 터에서 ‘영묘사(靈廟寺)’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나와 선덕여왕 때 창건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천경림(天鏡林) 터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하는 남천가의 숲으로, 국당에서 서남쪽으로 걸쳐 있었다. 사라호 태풍 이전까지도 소나무와 버드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문천교 북편 도로 좌우 숲을 ‘황남숲’이라 하고 마을이름도 ‘숲(숫)각단’이라 불렀다. 신라진흥왕 때는 경주에서 가장 큰 숲으로, 흥륜사를 비롯한 많은 절을 짓는데 이 숲의 나무를 베어 썼다고 한다. 지금은 소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오천정씨효열각(烏川鄭氏孝烈閣) 경주최씨 가문에 출가한 오천정씨는 임진왜란 때 병든 시아버지를 모시로 황룡으로 피난 갔다가 숲속에서 며칠을 굶으면서도 병들어 움직일 수 없는 시아버지를 간호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임금(순조)이 1592년 효열각을 세우고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했다. 원래 효문리에 있었는데, 구역 부지에 편입되어 국당마을로 옮겼고, 1970년 금성로가 개설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흥륜사 서편 도로 옆에 있다. -영흥사(永興寺) 터 경주공업고등학교가 들어선 곳으로 학교 부지 정지작업 때 초석과 기와 등이 대거 발견되어 그 위치를 근거로 영흥사 터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 규모나 여러 가지 근거로 보아 흥륜사가 영흥사 터이고 이곳이 흥륜사 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문호사(汶湖祠) 터 조선 순조 29년(1829)에 이승증(李承曾)의 학문과 효행을 기려 지었으나 고종 5년(1868)에 금령으로 헐린 문호사가 있었다는 터로 흥륜사 동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문호사는 인왕동의 첨성대 북편에 있다. 최부자가 천냥에 사들인 논 -구들들 국당 남쪽의 비옥한 들이다. ‘구들이’, ‘구들’, ‘구들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일대가 비형랑과 두두리의 전설이 얽힌 ‘귀교(鬼橋)’와 관련성이 높다. 또 이 들이 ‘귀교보’에서 물을 대고 있어 ‘귀교들’, ‘귀들’이 변하여 ‘구들들’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삿뒤밭 흥륜사 터 북쪽에 있는 밭으로 절(寺) 뒤에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흥륜들이다. -안태진 터 흥륜들 가운데 상답에 해당하는 들로 현재 신라초등학교 자리이다. -천경림밭 남천과 서천이 합류하는 부근에 있는 논으로 본래 천경림을 밭으로 개간했다. 지금은 논으로 만들었다. -천냥배미 갑오년 흉년 때 교리 최부자가 천 냥을 주고 사들였다는 흥륜들의 논이다. ‘천냥짜리논’이라고도 한다. 흥륜사 서북쪽에 있다. -한섬지기 심한 흉년에도 쌀 한 섬은 났다는 흥륜들 가운데에 있는 논이다. -활대배미 활대(장대)처럼 길게 생긴 흥륜사 동편에 있는 논이다. -흥륜들 흥륜사가 있었다는 들로 국당 북쪽 금성로 양쪽에 있다. 물거머리거랑 ‘사천(沙川)’ -남천(南川) 국당과 오릉 사이를 흐르는 거랑으로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산과 월성을 거쳐 서천으로 흘러든다. 그 상류는 ‘사등이천’이라하고, 남천은 ‘문천(汶川)’, ‘사천(沙川)’으로도 불린다. 문천은 삼기팔괴의 문천도사(汶川倒沙)에서 유래했다. 사천(沙川)은 물거미거랑이라는 뜻이다. -돈대밭 흥륜사 터의 흙으로 쌓은 단으로 법당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감나무밭을 일구어 ‘돈대밭’이라 했다. 사라호 태풍으로 마을이 침수되었을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주민들이 이곳에서 물난리를 피했다고 한다. -수랏질 사정동과 황남동의 경계가 되는 길로, 지금의 35번 국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경주읍성 남문에서 내남으로 연결하는 길이다. 옛날 순라군들이 다니던 길이라서 ‘순라길’, ‘수랏질’이라고 한다. -생이거리 터 생이(상여)집이 있었다고 하는 터, 금성로 서편 국당마을에 있다. 찬물샘이 찬 샘물이 솟아난 곳으로, 신라초등학교 서편의 들에 있었으나 지금은 도로가 나고 없다. -큰소탕걸 인왕에서 황남과 흥륜들을 거쳐 서천변에 있는 청소(淸沼)로 들어가는 도랑이다. -합수(合水)골 남천과 기린천이 합수하여 서천을 이루는 안쪽 삼각주의 모래땅이다. 2만여명 졸업생 배출 -경주공업고등학교 경주공업고등학교(교장 이배식)는 1932년 11월 1일 경주공예실수학교로 개교한 이래 1945년 9월 1일 경주공립초급중학교, 1947년 8월 8일 경주공업중학교, 1951년 9월 25일 경주공업고등학교로 학교명이 변경되어 왔다. 본래 황오동에 있던 이 학교는 1949년 8월 30일 사정동 현 위치로 이전했다. 현재까지 총 2만1천93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6·25참전전몰학우위령탑 6·25전쟁 당시 경주공업중학교(5년제) 재학생으로 지원 입대하여 산화한 학우들의 명복을 빌고자 1984년 경주공업고등학교 교정에 세웠다. -국당노래비 1997년 국당마을회와 국일계가 주관하여 국당마을회관 앞에 세운 비로 ‘국당수양단가’전문이 새겨 있다. 이 노래말을 지은 정남수는 1915년 국당에서 태어나 계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2세인 1937년에 국당마을 소년들을 모아 수양단을 조직하고 야학을 열어 애향심을 길렀다. 그 후 수양단은 반일단체로 의심받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정씨는 1942년 28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분난경로당 이 마을에 살던 임분난 이라는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집을 마을에 희사해서 여성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분난경로당’이라고 한다. 경주공고 동편에 있다. 묶인 땅 수용이나 세제혜택이라도 사정은 도심권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지만 아직은 인심이 살아있고,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예전에는 잘 사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최근 고도제한 및 한옥미관지구로 묶여 개발제한으로 발전이 안 되고 있어 빈촌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예전에는 알짜마을이었는데 문화재로 인한 고도제한과 미관·골기와지구로 묶여 피해가 많다. 토지를 수용하거나 세제혜택을 주든지 아님 풀어주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주민들은 경주공고 남쪽 담벼락으로 난 도로가 최근 교통량이 많아 확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국당마을의 소방도로 개설을 요구하고 있다. 또 경주공고 서편의 소방도로의 경우 이미 토지보상이 끝났는데 공사가 안 되고 있다고 이의 조속한 시행을 바랐다. 또 금성세차장 동편의 마을안길의 확장도 바라고 있다. 김하우(76 전 고려대 교수), 김기수(73 전 새마을본부 총무부장), 김월준(73 시조시인), 서영수(71 시인), 최종걸(70 전 한국선급협회 전무), 한동길(70 예비역육군대령), 박정봉(69 전 현대중공업 전무), 박동철(68 울산 새한물류센타 대표), 박세환(65 동춘서커스단장), 손호익(64 전 경주시의장), 이종구(62 대구 와룡중학교 교장), 한동조(62 환경관리공단 부장), 서진수(61 전 외동읍장), 이인환(61 대구 변호사), 김추(60 목사), 이영우(58 경주시 문화예술과장), 이시환(57 변호사), 최이우(55 목사), 박홍래(00 강릉대 교수), 김병근(49 대명건축사), 박원락(48 금성건축사), 최재만(47 울산경찰청 경정), 최준철(45 (주) 유엠디 대표), 박기홍(43 부산mbc 앵커)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홍염도 탑정동장과 이시우 노인회장, 최순남 통장을 비롯한 주민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