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사대부 문인들은 지필묵을 늘 가까이하며, 서예는 기본으로 시(詩), 서(書), 화(畵)를 즐기는 고상한 인품을 고양시켜 왔다. 일반적으로 문인화(文人畵)는 사대부의 전유물로서 인품과 학문을 겸비한 지식인의 성품을 바탕으로 하여 표출되는 지성과 감성의 산물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단순히 먹으로 그린 묵화가 아니고 그 속에는 풍부한 시적 운치와 그림에 걸맞는 서의 조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문인화로서의 품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의 시가 열 손가락으로 튀어나와 매화그림이 되고 난초그림이 되고 대그림이 되었다. 시가 연달아 그림으로 화하니 집에 그림이 가득 차게 되었다” 조선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빼어난 기질의 묵객(墨客), 조희룡(趙熙龍)이 그의 저서에 남긴 말이다. 그는 추사의 제자로 알려져 있고 산수화와 사군자류의 화목(畵目)에 독특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요즈음의 문인화에는 그림만 있고 서는 그림에 어울리지도 않으며 시는 아예 없다. 문인화가 아니고 그냥 먹그림일 따름이다. 붓의 테크닉만 튀어나오고 먹의 검정색만 난무한다. 재주그림일 따름이다. 묵(墨)의 유현성(幽玄性)에 대하여는 본질을 떠난 것이다. 조희룡은 다시 말한다. “가슴속에 높고 맑은 기운(氣韻)이 있으면 붓을 잡을 때에 또한 이 기운이 있게 된다. 이는 남의 것을 답습해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한 인품이 높으면 필력 또한 높다” 조희룡은 유배지에서 대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다. 유배 이전엔 매화와 난초를 즐겨 그린 그의 심성의 변화가 유배지에서는 대나무 그림의 호방한 기운이 폭발한 것이다. 대나무 그림의 스승이 따로 없고 바로 자연그대로의 대나무라고 호탕스레 말하는 조희룡의 대나무 그림은 분노의 표현 바로 그것이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